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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5월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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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재 박사] 고통

전동재박사
Dallas Baptist University 겸임교수

“사는게 고통이라는 건 벗어 날 수 없는 진리이다.”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을 저술한 기시미 이치로 라는 일본 작가의 말이다.

그가 진리라고 까지 말한 이유를 좀 더 풀어 쓰자면 다음과 같다. 새는 진공에서는 날 수 없기에 공기라는 매질을 필요로 한다. 새는 공기라는 매질의 저항을 부력으로 전환시켜 창공을 난다. 따라서 새는 공중을 나는 한 공기의 저항을 맞으며 사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공기의 저항이 다름 아닌 고통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물고기들은 물 속에서 부력을 의지하여 헤엄을 친다. 물이란 매질에도 역시 저항이 있기 때문에 물고기들은 움직일 때 물의 저항을 비껴 가기 위해 몸부림, 즉 헤엄을 치는 것이다. 헤엄을 친다는 말은 물의 저항과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물의 저항이 고통이라면 헤엄치는 행위는 그 고통을 최소화 하기 위해 변형될지언정 물의 저항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공기나 물과 같은 매질처럼 천태만상 가지각색으로 편만하게 존재하는 고통을 마주하고 다루고 처리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인생도 어머니의 해산의 수고를 통해 시작되고 생의 첫 호흡도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호흡도 힘겨운 날숨으로 끝날 것이며 남겨진 사람들에게 이별의 아픔을 안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독일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는 인간의 숙명을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 고통이 있었다.”라고 한 문장의 시로 표현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고통에 반응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 몸은 고통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고통을 느끼는 수용체가 온 몸에 골고루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존재하는 모든 설계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통각(Nociception)에는 의도와 목적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고통을 좋아하는 인간이 있을 리 만무하나 만약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없앤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병 혹은 문둥병이라고도 불이던 한센스씨 병은 한때 전염성이 강하고 삶을 초토화시키는 질병으로, 성경에서는 더군다나 부정한 질병으로 여겨졌다. 나병환자는 가족으로부터 조차 격리되어 영문 밖에서 살아야 하는 불가촉천민으로 사회적 소외를 죽을 때까지 떠안고 살아야 했다.

1873년 노르웨이 의사인 한센스(Hansens)가 나병환자에게서 병의 원인인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Mycobacterium Leprae)라는 세균을 발견하면서 나병은 9개월에서 20년 사이의 잠복기를 가지며 그다지 전염성이 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는 충분히 치료가능한 질환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럼 이 세균은 어떻게 나병을 일으키는 것일까? 이 균은 우리 몸에 통각을 담당하는 신경을 마비시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통각을 무디게 한 것 뿐인데 그 것은 많은 것을 잃게 한다. 크고 작은 상처에 반응하지 못한 결과 사지의 말단 부분들, 즉 손가락, 발가락, 귀, 코와 같은 몸의 말단 부위를 잃을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 실명까지 초래한다. 박테리아가 직접 손상시키는 부분보다 통각 상실로 인해 스스로 몸을 손상시키는 부분이 더 큰 질병이 나병인 것이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열명의 문둥병자들은 다름 아닌 통각의 상실, 즉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오히려 고통받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몸과 삶은 결코 축복이 아니라는 메세지를 나병이 던져주고 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기적은 그들의 피부를 단순히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무뎌진 통각을 회복시키는 근원적인 복구 작업이었다.

잘못된 원인을 안다면 재발 방지를 위해 고쳐 회복 시키면 되지만 자신이 마주하는 우주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의 원인에 대해 질문한들 답이 딱 떨어지지 않는다.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있게 되었는지 그 질문에 정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백인들조차 존경하기를 마다 않는 흑인 농학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는 목화 경작으로 땅이 힘을 잃어 갈 때 땅콩을 심어 옥토를 일군 인물이었다. 하지만 땅콩이 풍년이었음에도 판로가 없어 다 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괴로워하면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우주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인간을 만드셨는지 물었다. 하나님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질문을 하라”는 말로 그 질문들을 기각했다. 그래서 왜 땅콩을 만드셨는지 묻자 하나님께서는 “이제야 옳은 질문을 하는구나” 수긍하시면서도 이 조차도 “너는 한줌의 땅콩을 들고 실험실에 들어가라” 음성으로 답을 대신했다고 한다. 그가 땅콩을 연구한 결과 300가지 이상의 발명을 일구어 냈고 그로 인해 남부 경제가 살아났다.

이처럼 당면한 고통의 원인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 하기보단 이런 고통이란 매질의 저항을 어떻게 부력으로 바꾸어 살아갈지 내가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보는 일이 필요하다.

고통이 우리 내면에서 저 높은 뜻을 향한 갈증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에서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함으로 우리를 날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고통은 축복을 가장한 것일 수 있겠다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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