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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4월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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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삼석 목사] “나사렛”, “나사렛 예수”, 그리고 “와서 보라!”

방삼석 목사
달라스 뉴라이프 선교교회 담임

갈릴리로 가려 하시는 길에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제자가 된 빌립은 크게 흥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때를 기다리고 있던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요1:45) 그러나, 나다나엘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왜냐하면, 빌립이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요1:45).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당시 나사렛은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 도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이나, 탈무드나, 유대인들의 어떤 글에도 언급된 적이 없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을 메시야와 연결하는 것은 정말 억지스러워 보였을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나다나엘 같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메시야’와 ‘나사렛’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인식 부조화의 영역과 패러다임들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 인식론들의 한계
근대 이후의 인식론은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크게 나눕니다. 근대의 정신에 생기를 불어넣은 데카르트(1596-1650)는 합리주의의 전형이지요. 그는 수학적으로 명석판명한,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모든 사유판단의 근거가 되는 명제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의심하는 나는 존재하며, 나의 관념안에 있는 완전자는 유한한 나로부터 나올 수 없고, 신은 본성상 우리를 속일 수 없어서 우리 외부의 자연세계도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결론을 연역하여 냅니다. 유한에서 무한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불완전한 존재에게서 완전의 개념은 스스로 나올 수 없는 것이기에, 재미있게도 이성은 철저한 자기 유한성의 인식안에서 절대적 인식의 정당성을 얻습니다. 데카르트에게 합리적 의심은 유한한 존재의 자기증명인 셈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불완전속에 있는 완전, 그 선험적인(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닌 본래적으로 우리안에 존재하는) 것의 진리 경험은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얻은 진리명제(Cogito ergo sum)를 토대로 할 때만 가능하기에 데카르트는 분명한 합리주의자입니다. 유한한 존재에게 완전을 경험하게 해 줄 유일한 수단이 다름 아니라 이성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경험론자들은 경험에 앞서는 선험적 판단자체를 부정합니다. 인간은 백지(Tabula rasa)상태로 태어나 경험을 통해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지, 경험에 선행되는 개념들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경험도 감각지각에 대하여 우리 마음의 반성을 통하여 습득되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경험론자인 존 로크(1632-1704)는 모든 참된 인식의 원천은 감각이라고 하였습니다(F. 코플스톤, 『영국 경험론』이재영, 서광사, 1991). 경험론자들에게는 합리주의자들이 외부세계와 경험 초월적인 사태들에 대하여 증명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경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라면 참된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나다나엘에게 “나사렛 예수”와 같은 것이죠.

◆ 믿음의 인식론
빌립의 “나사렛 예수”와 나다나엘의 “나사렛 예수”의 인식론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나사렛 예수”는 합리주의자들에게는 합리적 이성안에 절대화된 본유관념처럼 논리적 비약이 필요하고, 경험주의자들에게는 경험될 수 없는 어떤 것이어서, 나다나엘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빌립은 “나사렛 예수”를 전했습니다(고전1:22).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를 경험한 빌립의 “와서 보라!”에는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그래서 또한 설명할 수 없는 누미노제의 희열이 담겨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이런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니…”,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와서 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인식론적 부조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빌립은 자신의 합리적 이성이 절대화한 통념의 체계,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현실적 가치체계 너머의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이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주님이셨고, 그 분에 대한 믿음은 자기부정과 자기 세상을 넘어서게 하는 용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역설과 모순의 인식론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 “와서 보라!”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것도 우리의 합리적 추론이나, 감각지각을 통한 지식으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와서 보라!”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한 자의 초대이고 도전입니다. 거기에는 믿음으로 “나사렛 예수”에게서 모세와 율법이 예언한 실재를 보고,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난 증거를 경험한 신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믿음도 신비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도 아니기때문입니다.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하신 것처럼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보라!” 말 걸어주어야만 일어나는 신비입니다(사45:4). 나사렛 예수를 만나는 믿음은 결코 우리 자신들의 지혜와 경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저 멀고 거친 인식의 땅끝에서부터 불러 세우신 분이 계십니다. “나는 너를 땅 끝에서 데려왔다. 먼 곳에서 너를 불러 세우며 일렀다.”(사41:9)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바로 그 비상한 (Extraordinary)것의 경험은 잘못된 인식체계, 오염된 가치 체계에 갇힌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신 그 분과 우리를 불러주신 분을 경험하는 환희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오늘도 우리에게 “와서 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나사렛 예수”앞에서 우리의 철옹성같은 인식의 체계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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