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에 살던 집 앞에 아름드리 오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잎이 무성해서 계절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무의 깊은 뿌리와 그 기원을 다 알 길은 없었다. 담장을 덮을 만한 풍성한 나뭇가지와 달보드레하게 열린 오디에 바람의 흔적과 햇볕의 숨결이 담겨있었다. 나무가 어찌나 무성하게 잘 자라는지 나뭇가지가 옆집 담 너머로 자꾸 구경을 나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원사가 나무를 잘라 그루터기만 남게 되었다. 나무는 침묵 속에서 날카롭고 차가운 톱날에 의해 몸통이 잘려 나갔다. 그 순간 나뭇잎과 열매는 땅의 호흡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오디나무 그루터기에서 파릇한 고개를 들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단단하고 거친 그루터기 위로 오묘한 생명이 고개를 내미는 풍경과 마주했다. 눈을 뜨기 시작한 오디나무 새싹이 어느새 거칠고 투박했던 그루터기에 생기를 더했다. 필자의 모든 촉각이 오디나무 새싹에 집중되었다. 오디 나뭇잎을 다시 볼 수 없으리라 마음을 내려놓았는데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듯했다.
그루터기에서 작은 새순이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마주했다. 새싹은 하나의 생명을 틔우기 위해 얼마나 먼 거리의 뿌리까지 에너지를 동원했을까. 새싹에 새겨진 뿌리의 수고와 땅의 호흡을 알고 있을까. 새싹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인내하고 수고하는지 오디나무 새싹은 알고 있으리라. 새싹은 미풍에도 흔들리며 자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듯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더 단단한 생명이 새겨졌으리라. 새싹을 위해 전심전력하고 고군분투했을 나무의 눈물과 수고를 알 것 같았다.
오디 열매를 따려고 나무 앞으로 갔다. 다시 마주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오디 나무에서 열매를 보았을 때 마음이 남달랐다. 생을 다한 것 같은 나무에서 다시 생명을 잉태하는 풍경은 경이로웠다. 오디의 빛깔이 얼마나 깊고 매혹적인지 그 자태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나무 위에서 발레하는 요정 같았다. 오디를 조심스럽게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열매를 맺고 익기까지 얼마나 많은 폭풍을 마주했을지 가늠하며 정성스럽게 손에 넣었다.
열매를 따기 시작했을 때는 바람이 없어 잔잔했다. 열매가 잘 보이지 않아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오디나무에 앉아 왈츠를 추는 것이 아닌가. 주인의 손을 기다리고 있던 열매들이 자세히 봐 달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그 순간, 보이지 않았던 열매가 보였다. 오디가 나뭇잎에 가려진 채 탐스럽게 웃고 있었다. 별달리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오디 열매는 손이 닿기만 하면 한 움큼씩 손안으로 들어왔다.
어느새 필자의 손에 있는 바구니는 검붉은 오디로 가득 찼다. 햇살이 내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열매들이, 바람이 불 때 나무 그늘에 숨겨져 있던 모습들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바람이 불고 방향이 바뀔 때마다 미처 보지 못했던 오디의 모습이 보였다. 몸을 낮추고 밑에서 오디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무가 검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온통 오디 열매뿐이었다. 바람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나무가 소중히 품어온 비밀스러운 선물 같았다. 나뭇잎에 가려져 있던 열매들은 바람의 손길을 통해서 그 존재를 드러냈다. 그 풍경을 마주한 필자의 시선은 그제야 나무의 낮은 곳과 숨겨진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보았을 때 보이지 않았던 열매들이 자세를 낮추고 밑에서 바라보니 다른 나무로 보였다. 몸을 조금만 더 낮추고 보았더라면 열매가 땅에 떨어져 무가치하게 버려지는 일이 없었을 터였다.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고 더 주의 깊게 살폈으면 어땠을까. 안주인의 무관심으로 마음고생했을 오디 열매를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늘 보는 위치에서, 같은 각도에서 보이는 것만 보고 그 이상의 것을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양한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관찰하면 평소에 쉽게 간과한 것들조차도 다른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을듯하다. 다양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무를 흔들지라도, 그 나무는 정원에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고 서 있다.
같은 사건과 상황인데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결론을 유추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의 눈에는 그저 흔들리는 나뭇잎만 보였지만 바람이 불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열매가 보였다. 평온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바람이 지나간 후에야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였음을 알게 되는 듯하다. 우리 삶에 찾아온 바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세밀하신 섭리와 뜻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고정관념으로 현상 너머에 숨겨진 은혜의 실체를 간과하는 듯하다.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바람을 내 시선이 아닌 낮은 곳에 머무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