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2장 12절에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심판의 권세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선포합니다. 곧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꿰뚫어 보시며, 진실과 거짓을 가르고, 순종과 불순종을 판별하시는 절대적 기준이 됩니다. 교회가 무엇으로 판단받겠습니까? 세상의 평가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인기나 규모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버가모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정치적·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제우스 신전과 황제 숭배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고, 온 도시가 우상숭배의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버가모 교회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특별히 안디바라는 충성된 증인이 순교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안디바를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부르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증인이란 단순히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생명으로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증인의 삶은 바로 그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세상의 압력과 위협 속에서도 “예수님만이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칭찬받는 삶입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가 칭찬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14절과 15절에서 주님은 분명히 책망하십니다. 교회 안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발람의 교훈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붙들려는 타협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한 발은 교회에,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살아가는 이중적인 삶입니다. 니골라당의 교훈 역시 위험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적 사상에 영향을 받아, 영적인 것은 중요하지만 육신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혼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왜곡된 생각은 결국 도덕적 타락을 정당화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쉽게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삶은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일에는 거룩한 표정을 짓지만, 월요일부터는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물질과 성공, 쾌락과 인정에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스스로는 괜찮다고 위로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화입니다.
세속화는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스며듭니다. 처음에는 작은 타협으로 시작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반복되면서 마음이 둔해집니다. 결국 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회개의 눈물이 마르게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교회를 향하여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의 경고는 분명합니다.
말씀의 검으로 죄를 도려내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드럽고 위로가 가득한 설교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필요할 때 날카롭게 말씀하십니다. 몸 안에 종양이 자라고 있는데 덮어두기만 한다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 안에 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외면한다면 결국 신앙은 무너집니다. 말씀은 때로 아프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살리기 위한 아픔입니다. 말씀의 검은 상처를 내기 위함이 아니라,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메시지가 경고로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17절에서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주실 약속을 선언하십니다. 첫째는 “감추었던 만나”입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신 하늘의 양식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먹이겠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양식으로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둘째는 “흰 돌”입니다. 흰 돌은 고대 사회에서 승리와 인정을 상징했습니다.
또한 법정에서 무죄를 의미하는 표식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흰 돌은 세상에서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인정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 “잘하였다,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시는 영광입니다. 세상의 박수는 잠시지만, 주님의 인정은 영원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극단적인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지만, 동시에 세속화의 유혹과 싸워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골적인 박해보다, 은밀한 유혹 속에 더 많이 흔들립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가치관이 변하고, 기준이 낮아지고, 말씀보다 세상의 논리를 더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주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분위기입니까?
교회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모임이 아니라, 거룩함을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치르는 군사입니다. 타협이 아니라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속화를 방치하면 결국 교회는 이름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을 살피고, 죄를 끊어내고, 끝까지 주님을 붙드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늘의 약속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말씀의 검을 들고 우리 가운데 서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증인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는 감추인 만나를 먹고, 흰 돌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 말씀 위에 굳게 선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