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아니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부교수
60년 대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이 대학생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습니다. 이때 젊은이들은 기존 세대의 제도와 가치관, 통념을 부정하고 인간성 회복, 자연으로 회귀 등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탈사회적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지요. 이들을 히피족이라 칭하였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이러한 젊은이들에 대한 강판 비판과 함께 그들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반기독교적인 무리로 낙인찍혔던 거지요. 그렇게 해서 그 당시 젊은이들은 교회와 결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들이 직장인이 되면서 그동안 살았던 자유분방한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도 하게 되면서 어느덧 반듯한 생활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온 청년들이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배척한 교회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그 세대가 지금은 70-80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 또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무관심한 세대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교회가 기성세대의 기준으로 청년들의 도발적인 행동을 비판하고 수용하지 못할 경우에 생기는 부작용을 역사적으로 경험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통합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의 돌출 행동으로 보이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고민해야 하는 걸 요구합니다. 사춘기 시절의 청소년들의 행동을 기성 세대의 기준으로 압박을 가하면 교회는 젊은이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기독교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우리 아이들을 믿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위클리프선교회의 동료였던 미국 출신 선교사는 법률 자문이 전문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한 동안 미국 본부에서 사역을 하다가 잠시 파푸아뉴기니를 방문했을 때 대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보고서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얼굴 여러 군데가 핀으로 뚫려있더군요. 그런데 아버지인 그 친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더라구요. 나중에 그가 하는 말이, “믿어주는 부모를 배반하는 자식들은 없다”는 거였습니다. 나에게는 너무 인상적인 말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의 아들은 다시 일상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동안 자신의 삶의 일탈을 표출해 보고 싶은 걸 부모가 열린 마음으로 품어준 결과입니다.
파푸아뉴기니 선교부가 있는 우까룸빠에서는 매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아이들을 위한 잔치를 부모들이 마련해 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행사 중 하나가 부모들이 연극을 준비하는데,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많아서 항상 인기있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그 연극에 나온 인물이 어른이 아닌 졸업생 중 하나가 연극에 출연한 것 같았습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연극이 진행되고 나서야 그가 그 아이의 아버지인 것을 알고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그 아이가 평소에 축구공 무늬로 머리를 깎고 다녔는데, 글쎄 그의 아버지가 아들과 같은 축구공 무늬 머리를 하고 자식 흉내를 낸 거였지요. 평소에 아버지가 그 아이 때문에 골치 아파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과감하게 아들의 입장에 서 본 거였습니다. 그 아이는 나중에 영국으로 돌아가 소방대원이 되었지요. 그리고 아버지처럼 선교사 자녀들의 영적 건강을 위해 마음을 쓰는 청년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부모가 자녀들을 믿어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부모가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냐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아이가 어느날 나를 찾아왔습니다. 반짝이는 보라색으로 염색된 머리가 눈에 번쩍 띄었습니다. 나는 그걸 보고 “야, 어떻게 이렇게 예술적이냐!”라며 감탄을 연발해 주었습니다. 나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했던 아이가 지금은 멋있는 플루트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때 내가 “그 머리꼴이 뭐냐”고 지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돌출행동을 한 아이 때문에 당혹스러워하는 부모에게 나는, “그대로 놔두라”고 조언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알아서 스스로 정리할 거라고 말입니다, 말 그대로 정말 자기 스스로 정리를 하더군요.
예배 시간에 청소년 아이들이 휴대폰 보는 걸 우리 교회에서는 그대로 둡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합니다. 예배 시간에 휴대폰으로 게임을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이것을 그냥 두면, 아이들의 신앙이 약화될 거라는 우려도 있기 때문이고요. 만약에 이 아이들이 청소년부 예배를 따로 드린다면 어떤 행동을 할 것 같나요? 청소년부 목회자가 설교하고 있을 때 그들은 영어로 설교를 하니까 정신을 집중해서 들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설교를 하건 말건 그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할 걸 하고 있을 겁니다. 핸드폰 사용을 규제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다른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문제는 아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거지요. 어른들은 청소년부 예배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이 꼴사나운(?) 장면을 보지 않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학교에서는 휴대폰을 모두 징발한다고 하는데, 왜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얘기도 듣습니다. 그 말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다만 우리는 아이들의 선택을 기다려주기로 한 겁니다. 교회 선배들 한테서도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도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핸드폰을 보고 있는 아이들이 설교에 귀를 닫고 있지는 않는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미 아이들은 예배 전에 소그룹으로 모여서 설교 본문을 가지고 자기들 나름의 토론을 했기 때문입니다. 설교 본문을 가지고 예습을 한 셈인 거지요.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토론했던 내용과 설교자가 전하는 내용을 나름 소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멀티태스킹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어폰은 사용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아이들도 그 이유를 이해하기 때문에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예습 과정을 통해서 본문을 숙지했기에 핸드폰을 손에 잡고 있어도 귀로는 설교 내용을 듣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던 아이들도, 청년부에 올라가고 성인이 되면서 더 이상 핸드폰을 손에 잡고 있지 않습니다. 설교 내용에 관심이 깊어지는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아이들이 지금 30대에 들어서기 시작했답니다. 휴대폰을 규제하는 게 나름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교회는 아이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기로 한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