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에 아침 식사를 하는데 커피잔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그림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어린 왕자 스토리를 아냐고 물었습니다. 어린 왕자, 굉장히 유명한데 막상 스토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 40년 전, 1986년에 제 아내를 만나고서 얼마 안 됐을 때쯤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아내는 국어국문과 학생이어서 제가 점수를 따려고 그때 읽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왕자가 사는 작은 별에 어디선가에서 장미 씨앗이 날아와서 장미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장미꽃이 예뻤지만 까다롭고 요구 사항들이 참 많았습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아오는 장미꽃의 투정에 지쳐서 결국 어린 왕자가 그 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지구를 방문하게 됐는데 지구에서 장미꽃이 아주 많은 정원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자기 별에서 보았던 장미꽃이 우주에 유일한 장미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장미꽃들 중에서 하나라는 것을 알고 낙심했습니다. 그때 여우가 나타나서 어린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 주었습니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장미꽃은 우주의 수많은 장미꽃 중의 하나가 맞지만, 서로에게 길들여진 특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 별의 장미꽃은 지구의 수많은 장미꽃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 자기가 물을 주고, 덮개를 덮어 주고, 불평을 들어 주고, 자랑도 들어주었던 서로에게 길들여진 오직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분명히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알고 있었던 예수님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기적을 했고,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었는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뿐이었습니다. 그 지식은 바울의 마음과 아무 상관도 없는,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정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하나의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격으로 오셨습니다. 바울을 아시고, 바울의 이름을 부르시며, 바울 앞에 실재하는 예수님을 대면한 순간, 바울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예수에서 주님이라는 특별하고도 친밀한 인격적 관계로 전환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삶은 율법이라고 하는 명확한 기준과 가치를 가지고 사는 종교적인 열심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에 계시고 바울 자신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법을 치열하게 사수해야 하는 바로 거기에 자신의 삶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라기보다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지만 인격적 만남 이후, 바울 삶의 원동력은 더 이상 그러한 외적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해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동행” 그 자체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역을 하면서 겪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단순한 종교적 교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곁에서 힘을 주시고 대화하시는 참된 친구이자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그 사건은 예수님을 머리로만 알고 적대시하던 아무 관계도 없던 예수께서 바울의 온 삶을 지배하고 이끄시는 가장 친밀하고 특별한 인생의 동반자로 거듭난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바리새파 중에서 바리새파 사람으로 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 성취와 열심에서 인생의 가장 큰 안정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4대째 기독교 집안이다, 모태신앙,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과 선민의식으로 주일에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하고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이 없다면, 예수님과 친밀감이 없다면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껍데기뿐인 열심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삶을 뒤바꾼 것은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기세등등했던 종교인 바울이 바닥에 엎드러져서 “주님,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진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과의 진정한 인격적 만남은 우리의 의지와 의로움을 꺾고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는 주님의 은혜 앞에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