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누구나 큰 무대에 서고 싶어 한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박수를 받고, 나로 인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순간을 꿈꾼다. 그러나 인생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리는 대부분 그런 화려한 무대가 아니다. 조용히, 알아주는 사람 없이, 묵묵히 감당해야 하는 자리일 때가 많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자리로 부름 받은 선지자다. 그가 부름 받은 때는 요시야 왕 13년, 남유다의 마지막 촛불이 가장 밝게 타오르던 시기였다 (렘 1:2).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어 20살부터 개혁을 시작했고, 26살에는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며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예레미야도 같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무너진 사사 시대에서 건져낸 사무엘처럼, 자신을 통해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맡기신 메시지는 정반대였다.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렘 1:15). 영광의 회복이 아니라 심판의 선언이었다. 나라는 결국 22년 만에 바벨론에 무너졌고, 예레미야는 그 몰락을 끝까지 지켜보며 백성과 함께 아파해야 했다.
예레미야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부흥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흥을 규모와 외형으로 가늠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큰 집회가 열리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날 때 부흥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욜 2:13). 이 말씀은 겉으로 드러나는 규모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마음을 찢고 돌아오는 사람이다. 진짜 기도하는 두세 사람, 진짜 말씀을 붙들고 성취를 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흥은 사람을 동원해서 만들어내는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돌아서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친히 일으키시는 역사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성경 전체 역사 속에서도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왕정을 세운 선지자였고, 나단은 다윗의 시대에 함께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자리는 무너지는 나라를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며, 항복을 선포하고, 70년 후의 회복을 예언 속에 심는 자리였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당대에는 무시당했다.
우리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게 주어진 역할이 예레미야처럼 작고 답답해 보일 수 있다. 남들처럼 눈에 띄는 열매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 가까이 설수록, 그 자리의 의미는 더 크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렘 1:5). 그리고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렘 1:10)고 선언하셨다. 어느 선지자도 받지 못한 사명이었다. 작아 보이던 자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크게 평가된 자리였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부러워하며 살지 말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리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화려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정직한 위로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마음을 찢고 돌아오는 사람이다. 진짜 기도하는 두세 사람, 진짜 말씀을 붙들고 성취를 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흥은 사람을 동원해서 만들어내는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돌아서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친히 일으키시는 역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