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실 사모]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루비 켄드릭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목숨을 드린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필자의 마음에 오랫동안 감동으로 남아 있는 선교사가 있다. 1900년대 초, 조선은 주변 국가들의 침탈과 극심한 가난, 각종 풍토병과 질병으로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땅이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던 시기, 하나님께서는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회 소속의 24세 젊은 여성 선교사 마음속에 조선을 향한 비전을 주셨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이다.

1907년 8월, 조선 땅에 첫발을 디딘 루비 켄드릭 선교사는 개성 지역으로 파송되어, 소외당하던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 및 복음 전파 사역에 온 힘을 다해 헌신했다. 당시는 켄드릭 선교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교사가 조선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사역하던 시기였다. 켄드릭에 앞서 조선을 찾았던 의료 선교사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은 청일전쟁 직후 평양에서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마저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의 아내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역시 남편과 어린 딸을 조선 땅에 묻는 슬픔 속에서도 끝까지 조선을 떠나지 않고 한글 점자 도입과 여성 전문 병원 설립에 평생을 바쳤다. 켄드릭과 선대 선교사들은 절망에 빠진 조선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복음 사역을 이어가던 루비 켄드릭은 입국한 지 불과 9개월 만에 예기치 못한 시련을 맞이했다. 1908년 급성 복막염에 걸려 25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가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와 양화진 묘비에 새겨진 고백은 오늘날까지 한국 교회사와 성도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불꽃으로 남아 있다.

“만약 나에게 줄 수 있는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나는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치겠습니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가 조선 땅에서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그녀가 바친 희생을 통해 많은 영혼이 생명을 얻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순교 소식과 마지막 유언이 본국의 청년들에게 전해지자, 수많은 미주 청년들이 큰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내가 루비 켄드릭의 뒤를 이어 조선 땅으로 가겠다”고 결단하며 스스로 선교사로 나섰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한국 교회사라는 거룩한 역사의 흐름 속에는 루비 켄드릭처럼 기록으로 남겨진 이들 외에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황폐한 조선 땅을 위해 자신의 목숨과 청춘을 기꺼이 바친 수많은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존재했다. 조선에 온 지 불과 십여 일 만에 이질로 숨을 거둔 이사벨라 몽고메리 선교사, 낯선 풍토병과 악조건 속에서 첫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은 메리 레이시 선교사, 결핵과 고열 등의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사명을 감당하다 순교한 수많은 선교사와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있다. 이 수많은 순교자가 묻힌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던 희생의 흔적이 새겨진 곳이다.

이 묘역에는 선교사 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의 낯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어린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까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역사의 공식 문서나 기록에는 그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을지라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흘린 그들의 피와 눈물은 거룩한 씨앗이 되었다. 그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 교회가 존재하며, 복음에 빚진 민족으로서 열방에 복음을 전할 세계 선교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루비 켄드릭과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바친 것은 삶의 일부분이 아닌, 그들이 가진 전부이자 단 하나뿐인 생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신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너에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무엇을 위해 바치겠느냐?”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드린 젊은 선교사들의 헌신은 결코 과거의 역사 속에만 갇혀 있을 수 없다. 120여 년 전 어둡던 조선 땅에 복음의 빛을 전하기 위해 청춘을 바쳤던 수많은 선교사처럼, 이제는 우리가 영적 기근과 혼돈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열방의 영혼들을 향해 복음과 십자가 사랑을 들고 나아가야 할 때다.

자신의 안위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위해 담대히 열방으로 나아갈 거룩한 헌신자들이 다시금 일어날 때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가 품었던 ‘1,000개의 목숨’이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어두운 열방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역사가 모든 세대, 모든 민족 가운데 다시 한번 뜨겁게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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