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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5월 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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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보 목사] 느린 걸음 빠른 인생

김귀보 목사
큰나무 교회 담임

나는 31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미국 땅을 처음 밟았다.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마음 한 켠에 박혀서 사라지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너무 늦게 왔다’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가,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왔으니 너무 늦은 나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부러웠고, 10대에 미국에 온 사람이 부러웠다. 내가 20대 초반에만 왔었어도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 늦게 왔다는 생각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런데 18년이 지난 지금은 늦게 온 것에 대한 후회와 먼저 온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은 사라지고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차 있다. 여전히 좀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아쉬움은 남아 있다. 그런데 먼저 온 것보다 더 큰 것을 18년의 인생 가운데 경험했고, 늦게 오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보석 같은 인생의 진리를 경험했다.

성경에 보면 첫 이민자가 나온다. 그 시대의 최고의 문명과 편안한 생활을 보장하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이 이민을 떠난 나이가 75세였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서 새로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임에 분명하다.

새로운 땅으로 가면 아들을 주고, 명성을 얻게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줄 정도의 복의 원천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솔깃한 제안이었는지도 모른다. 75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고, 명성을 얻게 하고, 거기에 더해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은 희망이고 핑크빛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을 쫓기에는 아브라함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70대를 훌쩍 넘기고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 꿈을 좇았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다. 순종이다. 약속을 붙들었다.”라고 표현한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차디찬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풍요의 땅을 기대했는데 현실은 흉년과 기근의 땅이었다. 명성을 기대했는데 초라한 이방인이었다. 아들을 기대했는데 아내 사라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기만 했다. 아브라함에게는 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었다. 토끼처럼 뛰어가도 늦은 나이인데 아브라함의 걸음은 거북이처럼 느리기만 했다.

아브라함은 늦은 만큼 빨리 뛰어보고 싶어서 이집트로 눈을 돌렸다. 이집트 땅은 눈에 보기도에 풍요로웠고, 기회의 땅이었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대로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속이면서 편법도 동원해 보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달리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머리에서 나온 최고(?)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비참했다.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긴 것이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아브라함은 추방당하다시피 쫓겨나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왔다. 아브라함의 마음과 자존심에는 상처를 입었고,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새로 시작할 재물과 새로운 기회를 주셨다. 이것을 성경은 은혜라고 한다. 은혜는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행동을 했지만, 어리석은 선택을 했지만 새로운 기회를 얻는 것이다. 부끄러운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후회하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다.

새로 출발한 아브라함은 이제 천천히 걸어갔다. 토끼처럼 뛰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아브라함은 거북이처럼 걸었다. 더 빨리 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면서 기회주의자처럼 사는 사람들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얻었다. 평생의 걸음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 모든 믿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따른다. 누가 아브라함에게 감히 느린 인생을 살았다고 하겠는가? 가장 느리게 걸은 것 같지만, 가장 빠른 인생을 산 것이다. 우리 인생은 내가 팔다리를 빨리 움직인다고 빨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을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큰 손이 우리를 옮겨 주셔야 빨리 움직이는 것이다.

‘늦었다’는 우리의 생각이 현재의 삶의 발목을 잡는 것을 종종 본다. 나이, 결혼, 돈, 학력, 관계… 모든 것이 부족해 보이고 늦어 보인다. 내가 언제 이민을 왔는지, 언제 그 일을 시작했는지,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런데 현재는 내가 결정하고 걸을 수 있다. 때로는 느린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 늦은 나이에 이민을 왔다면 언어를 배우기에는 늦은 나이지만 인생의 경험과 인격의 성숙함이 더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없는 것을 보지 말고 있는 것을 보라. 다른 사람들을 따라 가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고유의 길을 걸으라. 인생의 가장 빠른 길은 내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속도로 걷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예레미야 10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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