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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5월 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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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숙 사모] 가교(架橋)가 된 글 한 편

서정숙 사모
시인
달라스문학회회원

광야기후인 폭염의 땅 달라스가 하얀 면사포를 곱게 쓴 아름다운 신부가 되는 3월. 도심지 곳곳마다 순백의 레이스로 치장하듯 겨울을 살아낸 긍지를 마음껏 펼치는 브래드포드 페어 트리의 꽃들. 겨우내 가지에 감추었던 꽃눈들이 뒤질세라 팝콘 튀기듯 꽃을 피워냅니다.
한선생님(물리치료선교사, 페트리샤 마가렛 Hunn)의 기독인적인 사랑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69년 1월 성당동의 선교사 사택에서 잠시 함께 숙식하며, 출퇴근했습니다. 아는 이 하나 없이 전임 교수님께 등 떠밀려 서울서 면접 온 새내기 물리치료사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예수쟁이’들을 끔찍이 싫어해 명작이라도 기독교영화는 물론 책도 외면했는데 아침 식사기도부터 취침 때까지 선교사님들과 함께했습니다.
당시엔 물리치료가 초창기였고 물리치료사가 귀했습니다. 꼭 예수 믿어야 한다면 여기 오지 않겠다는 엄포?에 “그러면 예수 믿겠다고 약속이라도 할 수 있습니까?” “아뇨, 그런 약속 못 합니다. 그냥 서울로 가고 싶지만 나환자 병원이라 오기 싫어 한다는 오해는 싫습니다. 일요일에 심심하면 교회는 가 볼 수 있습니다.” 싱긋이 웃는 양장로님의 통역에 호탕하게 웃던 바이너원장님은 “우리가 인터뷰를 당하고 있어요. 좋아요.”
두 해를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은 ‘예수쟁이’가 되었습니다. 구라선교회 병원은 새로운 천국이었고 서울 말씨 별종에 사회 초짜를 자녀 삼으신 사랑과 믿음의 산실입니다.
성경 전체가 믿어지지만, 궁금한 게 많아 야간 신학을 했고 한선생님이 그 지역 의료 선교사들의 모임에도 데려가시곤 했습니다. 방언에 대해 물었더니 한국어로 된 방언에 대한 소책자를 가져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한선생님은 얼마 후 본국인 호주로 가시고 제대로 표현 못 한 고마운 마음에 늘 궁금했습니다. 신앙 성장의 필수과목인 믿음과 사랑과 더불어 이유없는 질투의 대상이었던지 그 대가도 톡톡히 치르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환자들의 영적, 육체적, 정신적 치료에는 원장님과 직원들 모두 어찌나 열정적이었던지요. 미국 와서도 그분들의 이야기를 써서 달라스문학 카페에 올렸습니다.
달문 카페개설 시 2008년에 올린 글 한 편이 가교(架橋)가 되어 한선교사님 자료를 찾던 선교학 교수님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지인을 통해 영문도 모른 채 미동부의 교수님과 통화했습니다.
구라선교회 병원에서 10년 가까이 일 했을 한선교사님의 사진은 물론 구체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말씀이 가슴을 쳤습니다. 왜? 어떻게 그분의 기록이 없어질 수 있을까? 아주 오래된 것도 아닌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교수님께 감사해서 꽁무니 빼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몇 장의 사진과 내 글이 실렸기에 보관했던 〈나병 계몽지- 복지〉 몇 권을 보내드렸고 기꺼이 전화 인터뷰도 했습니다.
한 분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103분의 자료를 모은 교수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누군가 해야 할 일이지만 더 늦기 전에 두 권의 책 속에서 살아나신 의료선교사님들 “우리 시대의 사도행전일 것입니다.”라는 추천사에 공감합니다.
‘한국의 의료대란’을 마음 아프게 걱정하는 중 『대구 경북 의료선교와 의료선교사 1,2 ; 손상웅지음, 영남신학대학교 출판부. 2023, 9, 20 』 두 권을 저자인 교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한국에서는 많은 의사들이 의료현장을 떠났는데 멀고 먼 나라에서 의사가 없는 가난한 나라에 온 의료선교사 103분의 기록이 담긴 책을 받은 아이러니한 날입니다.
이 책의 추천사 중에서. “그들은 사명감으로 척박한 이 땅에 와서 여러 도시에 기독병원을 세웠습니다. 그들의 헌신이 대한민국의 의료수준을 세계 속에 우뚝 서게 했으며, 한국 복음사역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1890년대의 선교사 4분을 시작으로 1940년대까지 44분, 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59분인데 두 권 모두 500쪽이 넘게 103분의 사역을 기록했습니다.
출생과 부모형제, 사역과 사역지 등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성경의 연대기를 읽는듯 했습니다.
잘 알고 있던 의료선교사들의 기록이기에 마음은 이미 1969년으로 갔습니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 잊고 싶던 음과 양이 공존하던 당시에 여기연 전도사님과 한선생님은 따듯하게 남아 있는 분입니다.
내가 편치 않았던 것 때문에 음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지난 일인데 누군가를 잘못 판단할까해서 손 교수님을 피하고 싶었지만, 함께 일했던 산 증인이 되는 일이기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마음썼습니다.
갓 태어난 크리스쳔의 눈에 보이고 느껴지던 나환자 사랑과 무료치료라는 이슈는 거북스러움, 때로는 이율배반이었습니다. 회의와 비판적인 시각은 정신적인 믿음의 시련과 맞물려 만만치 않았지만, 신앙생활에서의 사춘기였나 봅니다.
기독교인들에 의한 사랑의 실천장이었지만 ‘당신들의 천국이었는지 한센환자들의 천국이었는지’ 주님 앞에 서는 날 둘 다의 천국이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누가복음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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