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프랜시스 올댐 켈시(Frances Oldham Kelsey)는 미국 식약청(FDA)의 신입사원으로 고용되어 일하기 시작한다. 직장상사는 그녀가 신입사원이었기에 비교적 쉬운 일인 신약의 안정성과 효능에 관한 서류심사를 맡긴다.
그녀의 첫번째 임무는 제약회사 머렐(Merrell)에서 신청한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의 약물 안정성을 심사하는 일이었다. 탈리도마이드는 1957년 8월 1일 독일의 제약회사 그루넨탈 (Grunenthal)이 출시한 신경 안정제로 특히 임산부들의 입덧을 완화해주는 경이로운 약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유럽에서 안정성과 효능이 검증되자 그루넨탈은 미국 제약 유통회사인 머렐(Merrell)과 손잡고 신약시장의 주요 무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 회사는 이 경이로운 약을 통해 미국 시장에서 수입 억 달러의 판매 수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프랜시스 켈시는 곧 약물 심사 과정에서 탈리도마이드가 태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동물실험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당시 지배적인 견해는 모체와 태아 사이에 일종의 생물학적 벽이 존재하기때문에 약물은 태반을 통해 태아로 건너가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많은 약물들이 태반을 쉽게 통과한다는 사실을 여러 연구를 통해 경험한 상태였다.
탈리도마이드의 안정성에 관한 내용들 또한 비과학적인 언어로 도배되어 있는 제품사용 후기 수준의 내용들이었지 과학적으로 잘 계획된 임상 실험 결과는 아니였다. 이에 그녀는 탈리도마이드의 승인을 거부하고 제약회사 머렐에게 약물 안정성에 관한 보완 실험을 요구하게 된다.
다급해진 제약회사 머렐은 수개월 혹은 수년 걸리는 보완 실험에 집중하기보다는 꼼수를 부리게 된다. 제약회사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연구자의 실험 결과를 가지고 설득하려고 했고 프랜시스 켈시의 직장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거센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 회유가 실패하자 제약회사 임원들은 문제는 탈리도마이드의 안정성이 아니라 시시콜콜 사소한 것을 문제 삼는 신입사원 프랜시스 켈시의 완고함이라는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탈리도마이드 승인을 6차례 거부하면서 50차례 이상의 항의 전화와 방문에 시달려야 했다. 탈리도마이드의 비극이 수면위로 올라오기 전까지 말이다.
1961년 유럽에서 탈리도마이드가 태아의 신경 손상을 초래한다는 보고를 시작으로 팔 다리가 기형적으로 짧거나 아예 없는 신생아가 보고 되기 시작했다. 이 신생아들의 공통점은 아기들이 모두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산모에서 태어났다는 점이었다.
약은 화학 구조상 왼손과 오른손처럼 유사하나 겹치지 않는 두가지 형태로 존재 할 수 있는데 이를 손대칭성 (Chirality)이라고 한다. 한가지 형태는 신경안정제로서 산모들의 입덧완화에 효능이 좋았지만 다른 형태의 성분은 태아의 신생혈관 형성을 억제하는 부작용이 있었고 이로 인해 태아의 사지 발달이 저해되었던 것이다.
태어난 아기들은 물개처럼 사지가 짧고 몸통만 발달된 형태를 갖게 되므로 이를 의학적으로는 물개지증 (Phocomelia)이라 명명했다. 보호시설에서 거부당하거나 심지어 가족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인 상황도 암암리에 벌어졌다. 인공 사지를 달기 위해서 그나마 달려있던 짧은 사지를 절단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들도 있었다.
유럽에서 만명 이상의 아이가 이 선천적 결함을 갖고 태어나는 동안 미국에서는 단 17사건만이 전해졌다. 느슨해진 규정을 틈타 발생한 비극이었지만 유럽의 경우처럼 대규모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결정적 요인은 제약회사들이 그토록 회유하려 했던 프란시스 켈시의 원칙과 신념을 향한 완고함에 있었다.
1961년 유럽과 미국에서 탈리도마이드는 약국의 진열대에서 제거 되었고 잠잠했던 프랜시스 켈시는 곧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은 그녀에게 정부 관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인 대통령상 메달을 수여하고 그해 Kefauver-Harris 수정 법안을 통해 FDA 의약 심사과정을 강화했다. 이는 미국 식약청 역사를 기원전과 후로 나누는 것과 같은 개혁이였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은 삼촌 모르드개의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라는 시대적 조명속에 탄생한 믿음의 절개이다.
프랜시스 켈시는 여성이 직장을 갖는 것은 가정을 책임지는 한 남성의 일자리를 고갈 시키는 것으로 간주하던 시대적 풍토 속에 살았다. 그녀는 시카고 대학에서 자신을 남성으로 착각하여 합격시키는 바람에 연구직을 이어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이 여성스러운 엘리자베스나 메리였다면 자신의 커리어는 거기서 끝났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중성적인 프랜시스 켈시였다는 점, 약물들이 태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연구했던 점, 식약청 약물 안정성 서류심사에 배정되었던 점과 첫 임무가 탈리도마이드에 관한 안정성 심사였다는 점, 신입사원으로 로비와 압력에 저항하며 원칙을 고수했던 완고함도 바로 그 때를 위한 것 아니였을까?
그리고 그 때 그것들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부여 받은 것들, 애써 성취한 것들, 가까스로 버텨가며 기다렸던 모든 것들은 혹시 오늘 이 때를 위함이 아닐까? 질문해본다.
크리스천 소명의식은 이 질문 속에서 자신을 시대적 사명의 자리로 부지런히 이끌어 내는 깨어 있는 정신이다. 상황과 타협하지 않고 원칙과 신념을 고집하는 보통사람들에 의해 이 사회가 빚을 지게 됨을 프랜시스 켈시를 통해 엿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