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실 사모] 폐허 속에 남은 기둥

미주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으로 수필에 등단했다. 시인, 수필가, 동화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 수필, 동화, 소설 등을 창작하고 있다. 목회하는 남편과 동역하고 있으며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거주하고 있다.

튀르키예를 몇 차례 방문하던 중, 이즈미르에서 진행된 봉사활동에 직접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봉사 일정을 마치고 잠시 유적지를 탐방했다.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고대 동지중해의 찬란했던 숨결을 간직한 역사적 도시 에베소를 만나게 된다. 오늘날 튀르키예 셀축 지역에 위치한 에베소는 그리스와 로마 제국, 초기 기독교 시대를 거치며 무역과 종교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거대 도시였다. 한때 25만 명이 넘는 인구가 밀집해 살았고, 고대 세계 7대 기적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을 비롯해 셀수스 도서관과 2만 5천 석 규모의 대극장 등 당대 최고의 건축물들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3년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에베소 교회를 세웠던 현장이기도 하다. 그 유적지를 천천히 거닐며 초대교회 성도들이 곳곳에 남긴 신앙의 발자취를 묵상해 보았다.

아무리 화려했던 제국의 도시라 할지라도 세월의 흐름을 비켜설 수는 없었다. 카이스테르 강물이 실어 온 토사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웅장했던 항구는 점차 바다와 끊어지고 말았다. 바닷길이 막히자 물류와 상업의 요충지였던 도시의 위상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찾아온 잔혹한 지진과 말라리아의 창궐은 결국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동지중해의 여왕이라 불리며 영원히 번영을 누릴 것 같던 에베소는 결국 황량한 폐허로 변해 역사의 정적 속에 깊이 묻히고 말았다.

에베소 유적지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흔적이 서린 묘역이었다. 핍박과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기꺼이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드렸던 이들. 그 묘비 앞에 섰을 때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죽음 앞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었던 신앙 선조들의 참혹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다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흘린 피와 헌신을 통해 지금도 구원의 역사가 그 땅에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한 팀원들 역시 한동안 말을 잃은 채, 침묵 속에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순교자들의 묘역을 지나 요한계시록 2장에 기록된 초대 에베소 교회의 터전과 유적들을 둘러보았다.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온전한 건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거대한 돌덩이들과 깨어진 아치, 바닥에 흩어진 잔해들만이 남아있었다. 안내 지도를 살피며 과거를 추측해 보았지만, 인간이 권력과 부를 위해 쌓아 올린 견고한 성읍도 결국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한 줌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대면할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그 황량한 폐허 한가운데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이 하나 있었다. 건물에 연결되었던 벽체와 지붕은 사라졌지만, 건물의 무게를 단단히 받치고 있던 몇몇 기둥들만은 2,000년의 세월을 아우르며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거센 세월의 풍파와 모진 지진의 흔들림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켜낸 기둥들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 언저리에 알 수 없는 깊은 울림이 내려앉았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환란과 영적 폭풍이 불어올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인가. 세상의 거센 풍조에 휩쓸려 날아가는 겨가 아니라, 어떤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의 기둥으로 서기를 갈망한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폐허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기둥들이 되면 어떨까.

에베소의 폐허 속에 담대하게 솟아있던 기둥들은 단순한 고대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난과 배교의 유혹 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순결을 지켜낸 ‘남은 자’의 거룩한 형상이었다. 인간이 구축한 바벨론 제국도 결국 한 포기 들풀처럼, 한 줌 먼지처럼 사라진다. 영원할 것 같던 건축물도,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의 권력도 결국 폐허라는 흔적만을 남긴 채 소멸했다. 하지만 황폐함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매일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는 영적 전쟁을 치르며 살아간다. 세속주의와 기복 신앙이 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침투하여 신앙의 본질이 희석되는 이 시대에 우리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지 잠잠히 돌아볼 때다. 거센 폭풍이 찾아올 때 오직 주님만을 향한 정결한 믿음으로 승리하길 갈망한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끝까지 남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 다시 오심을 예비하는 정결한 신부로 온전히 서게 되기를 소망한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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