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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4월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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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재 박사] 의심생활

전동재 박사
Dallas Baptist University 겸임교수

의심이 한없이 허락되는 세계가 있다. 과학 분야이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Scientific American이라는 과학 저널은 왜 의심이 과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인지 설명하는 글을 2020년 10월 9일 게재했다.

그 글에 의하면 합리적인 의심은 과학을 특징짓는 행위이고 과학은 의심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글에서 과학은 의심과 도전에 한없이 열려 있어야함을 강조했다. 과학에서 합리적 의심이 제대로 기능을 할 때 그것은 새로운 지식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질문을 하여온다는 점이다. 과학은 새로운 질문을 계속해서 물어오고 답하는 과정이지 확실성(Certainty)을 보장하는 행위가 아니다.

과천국립과학관 이정모 관장은 과학은 어떤 질문에 대해서 잠시 유효한 답을 제시할 뿐이지 이것이 진리라고 확실성을 갖고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불변의 진리라는 말이 있지만 과학은 그저 질문에 대한 최선의 “잠정적인 답”을 관측이나 측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제시 할 뿐 과학이 진리 자체가 되진 않는다는 말이다. 더 좋은 잠정적인 답이 나오는 즉시 기존의 답은 수정되거나 폐기 처분되어 왔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지동설과 태양 중심설을 주장하기 전인 천동설이 그랬고 원자를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양자역학이 나오기까지 기존의 원자이론들이 그랬다. 따라서 과학은 언제든 도전과 의심에 열려 있어야 하고 따지고 묻는 과정 없이 받아들이는 “묻지마 과학”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과학은 확실성을 보장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의심하는 일에 진심인 분야이다.

의심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을 때 과학을 접하는 대중들이 빠지기 쉬운 두가지 함정이 있다. 한가지는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믿는 과학 맹신주의(Blind Scientism)이다. 과학적 성취는 기사화되는 과정에서 대중으로부터 갈채를 받게 되고 그것을 이룬 과학자는 세상의 조명을 받게 된다. 200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황우석 사건의 핵심은 논문 조작이었지만 뒷배경에는 줄기세포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의 과학적 맹신이 팽배해 있었다.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 해서 거품을 제거해야 하는 작업이 과학이기도 하다.

에너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노벨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에너지가 무엇인지 아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답을 할 뿐이다. 우리는 빛이 무엇인지 알 것 같지만 빛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란 사실을 머리에서 도저히 그려낼 수 없다. 물리학자들은 이를 기술할 만한 인간의 언어가 없다고 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것은 허상일 뿐이다. 과학의 진정한 힘은 토론을 보장하는 것에 있고 불일치를 기꺼이 껴안는 포용력이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품 낀 상상이 아니다.

또 다른 함정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해 나타나는 혼란이다. 즉 증거가 결여된 의견이 과학으로 둔갑하여 대중에게 스며들 때 나타나는 혼란이다. 1955년 미국에서 소아마비 Polio 백신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소아마비 백신을 꺼렸다. 이 당시 유명한 사진 한 장이 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가 메스컴에 나와 소아마비 예방 접종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백신을 장려하는 정부의 노력을 통해 이 불신은 쉽게 극복됐는데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적어도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 기반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백신은 각종 음모론으로 일찍 물들여지는 바람에 가장 혁신적인 백신들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으로 오염된 불신 탓에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부분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5G 통신망을 타고 전파된다는 말에 여러 기지국이 파괴되는 일이 있지 않았는가? 백신 주사를 맞으면 정부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칩이 심어지고 우리의 DNA는 변형된다는 황당한 뉴스가 익숙하게 들려왔다. 코로나 팬데믹과 더불어 가짜 뉴스의 팬데믹도 다뤄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경험했다. 이 모든 것들은 과학분야에서 의심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할 때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믿음 생활에서 의심은 불신앙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신실성을 부정하는 의미로의 의심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의심이 불신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맘으로 말씀을 받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합리적 의심 속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성경을 이리 저리 검증(Examine)했다.(사도행전 17:11) 이런 베뢰아 사람들을 사도행전에서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신사적(More noble character)이라고 표현한 것이 참 흥미롭다. 간절한 맘으로 말씀을 받는 것이 절반이라면 동시에 또 다른 절반인 의심하고 검증하는 과정이 있어야 맹신을 피할 수 있고 우리는 신사적인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쉽게 속을 수 있을까?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 라는 영화에서 이단 사이비 종교의 악행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질문이었다. 기적, 신비체험, 눈에 보이는 메시아, 권력, 돈은 있으면서 단 한가지 나의 속죄를 위한 피흘림 그리고 부활 없는 짝퉁들에게 의심을 일찍 접어 버린 탓은 아닐까? 나의 믿음 생활은 곧 나의 의심 생활이다. 우리의 의심 생활은 얼마나 건강한지 한번 물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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