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 F
Dallas
금요일, 4월 19, 2024
spot_img

공태욱 전도사

불교 가정에서 태어난 저는 대학생 시절 미국으로 어학연수, 교환 학생으로 유학을 오게 되어, 어떻게 하면 성공을 할 수 있을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등등의 인생에 대해 한창 고민하며 사주팔자까지 공부를 하며 방황하던 때에 한인 학생회를 도와주셨던 장로교회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교회 청년분들의 인도로 금요 성경공부를 참석하게 되었고, 주일예배도 드리게 되면서 눈에 들어온 성경 말씀이 잠언 16장 9절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아버지께서 평생을 바쳐서 일군 회사가 IMF로 인해 부도가 나는 것을 보면서 ‘부와 명예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거구나’라는 것을 경험했었던 제게 비로소 인생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신 듯했습니다.

교환학생 이후로 한국으로 돌아와서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외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음성에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임을 확신할 수 있었고,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 전자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2003년에 삼성전자에 면접을 봐서 수원에 있는 프린팅 사업부로 입사하여 몇 년 후 초등교사인 아내를 소개받아 결혼 후 아들 딸을 낳았고 새 아파트를 대출받아 입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내는 초등교사 생활을 하여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어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나 소개를 주선해 주신 전도사님께서 저와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니 순종하라는 말씀에 기도를 하게 되었고,기도응답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었다고 했었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로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2013년 여름에 육아와 학교 업무의 스트레스로 인해 두통을 호소했었고, 병원에 가서 뇌척수검사를 받고 바이러스가 검출된 다음날 사지마비가 오면서 코마상태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어 인공호흡기를 하고 누워있다가 20일 만에 눈만 간신히 뜨게 되었지만, 모든 신체기능이 정지된 상태에서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고, 병원생활 1년 후 뇌병변 2급 장애판정을 받고 휠체어를 타고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권사님이신 장모님께서는 병원 지하 교회 예배당으로 내려가셔서 기도를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양손을 하늘로 올리도록 하여 평안 속에서 찬양과 감사기도를 시키셨다고 합니다.

아내가 수원집으로 온 후 장모님께서는 평일에는 제가 회사생활을 할 수 있도록 수원에서, 주말에는 대장암 수술을 하신 지 2년 정도 되신 장인어른이 계신 부산으로 가셨다가 주일 밤에 다시 수원으로 올라오시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삼성전자에 입사할 때는 프로그래머였었지만, 몇 년 후 해외영업으로 자리를 옮겨 주재원으로 나가야만 승진의 기회도 주어지지만 아내가 함께 외국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라 주재원으로 나가지 못하여 직장생활에서도 한계를 경험하면서 2018년에 하나님께서 저를 미국으로 다시 보내주신다면 신학공부를 하겠다는 기도를 했었고, 입사 이후 미국과는 연관이 없는 유럽 쪽 업무만 담당했던 터라 미국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포트워스 침례신학교에 온라인으로 지원서만 냈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지역 이동은 힘들지만 직장 내 인터콥을 통한 베트남 단기선교를 다녀온 후 바로 미국으로 지역 이동이 되었고 그해 10월에 미국으로 첫 출장을 가서 알게 된 사실은 저희 생활가전 사업부 에어컨 본사 사무실이 Roanoke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출장 중 주일이 있어 플라워 마운드 교회를 방문해 담임목사님과 식사 때 침례신학교에 대해 문의드렸더니 그 학교 출신이셨던 담임목사님께서 저를 위해 학교로 추천서를 써주셨습니다.

이후에 에세이를 적고 토플시험을 쳐서 입학허가는 받았었지만 학생신분으로 아내를 미국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는 입장이라 온라인으로 공부를 하기로 학교에 연락을 했었습니다. 7월에 직장 내에서는 제 위로 다른 상사가 부임하면서 제 업무를 그분께 인수인계를 했고 자연스럽게 승진의 기회도 멀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때 침례신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입학허가서를 발행할 테니 빨리 미국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입학처에서 국제학생과로 저의 온라인 수강변경 신청을 하지 않아 국제학생과에서 제게 연락이 왔었던 것이었습니다. 장모님께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갈 수도 있겠다는 말씀을 드리니 처음에는 반대를 하셨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을 하자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늦은 나이에 신학교 비자를 받기는 쉽지 않았지만 단기간에 비자가 나왔고 한국에는 장모님과 아내만 남겨둔 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중학생, 초등학생 두 아이들만 데리고 급하게 오게 되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는 사무실에서 편히 근무하며 높은 연봉을 받다가, 갑자기 미국 와서 가발 가게 점원으로 일도 해보고, 뜨거운 텍사스 햇빛 아래에서 에어컨 설치도 해봤었고, 지난 가을부터는 학교에서 최저 시급을 받으며 전기공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라는 회의감도 들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까라는 기대마저 들게 되었습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중대형 교회인 플라워 마운드 교회에서는 웹사이트 운영과 교적 관리로 봉사를 하다, 우연찮게 벤브룩에 있는 작은 한인교회 목사님과 연락이 되어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비록 성도는 적지만 전도사로서의 일인 다역을 하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때까지 많은 훈련을 시키셨는지 조금은 알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장모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남남으로 만난 아내가 저렇게 되었지만, 만일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작년에는 남편까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병원에 계시지만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분의 사위로 불평하는 것은 사치로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최근 기사

이메일 뉴스 구독

* indicates requi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