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바쁜 아침 출근길.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 많은 경찰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둘러 무리 지어 서 있습니다. 조그만 스피커를 통해 무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삭발하며 눈가에 눈물이 고입니다. 주변을 바쁘게 걸어가는 시민들은 잠시 멈추어 그들에게 시선을 보내 보지만 이내 그들의 발걸음을 옮깁니다. 곧이어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기 위해 몰려들고 안전을 염려한 경찰들도 줄지어 그들을 따르다 보니 지하철 승강장은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지하철에 이미 탑승해 있던 몇몇 시민들이 욕이 섞인 불평의 소리를 쏟아 냅니다. “나가! 나가서 하라고! 너희들이 도대체 뭐야?” 그러자 전동 휠체어를 타고 어렵게 지하철에 탑승하던 한 사람이 외칩니다. “저희도 시민입니다. 장애인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66번째 삭발 결의와 함께 144일째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하던 지난 2022년의 어느 여름날, 제 카메라에 담긴 모습입니다.
한국 사회가 장애인 인권 보장의 문제로 오랫동안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지난 2001년도 오이도 전철역에서 한 장애인이 리프트를 타다가 추락하여 사망한 사건 이후로 한국 장애인들은 출근길에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는 시위를 통해 장애인들의 “이동권 (Mobility Rights),” “교육권,” 그리고 “노동권” 등의 확보를 위한 처절한 투쟁을 벌여오고 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된 한국이지만 OECD 국가들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장애인 관련 예산으로 장애인들이 심각한 인권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들의 목소리에 정부와 시민 사회는 침묵했습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며 세상을 잠시 멈추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한국 사회에 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이런 방식으로 주장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오죽하면 이들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하철 시위를 끝내고 돌아오는 한 장애인에게 저는 카메라로 촬영하며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위하면서 다른 시민들에게 많은 욕을 먹고 무시를 당하시던데 괜찮으신가요?” 그분에게 돌아온 대답은 제 예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제가 입장 바꾸어 생각하더라도 교통이 막히고 하면 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참을 만해요. 왜냐하면 무관심보다는 낫거든요.” 무관심보다는 낫다는 그분의 말이 제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저에게 본인이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만들고 부른 “T4” 라는 노래를 알려 주셨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가 결정하는 것. 빼앗길 수는 없네.” 이렇게 시작하는 이 노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T4”라는 비극적인 역사의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독일의 나치(Nazi) 와 히틀러(Hitler) 가 2차 세계 대전 전 1939년도에서 1941년까지 독일의 장애인들 30만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장애인들을 생체 실험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장애인 한 명을 지원하는 비용이면 비장애인 다섯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이들을 학살하고 생체 실험한 그 장소가T4로 시작하는 독일의 연구소 주소여서 이 비밀 작전을 “Action T4” 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독일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홀로코스트 (Holocaust, 1933 – 1945)”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회자되지만, 사실 “T4”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기억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한국의 장애인들은 주장합니다. 80여년전에 독일에서 일어난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방법만 달리해서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비용의 문제를 그 논리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위해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와 저상 버스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비용 문제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T4” 노래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39년 T4 사회가 대한민국, 지금 이곳.”
5년 전 뉴욕에서 텍사스로 이주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마태 복음에 나오는 “팔복 (Beatitudes)”의 말씀에 기반을 한 영상 제작이 이제 7번째 작품, “이동권” 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올여름에도 카메라를 들고 장애인 분들과 지하철을 타려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비용의 논리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자주 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비용의 논리로 얘기하는 한국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에게, 그리고 잠시의 불편 때문에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욕설을 그들에게 퍼붓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라면, 다른 어떤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동할 수 있다” 라는 것이 누군가 에는 “이동권”이라고 간절히 원하는 권리가 되는 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의를 위해 목말라 투쟁하는 그들에게 주님의 축복으로 그들의 외로운 싸움이 충만하게 채워지기를 기도해 봅니다.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마태복음 5장 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