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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5월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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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실 사모] 요르단 와디럼에서

미주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으로 수필에 등단했다. 시인, 수필가, 동화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 수필, 동화, 소설 등을 창작하고 있다. 목회하는 남편과 동역하고 있으며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거주하고 있다.

몇 년 전, 아랍의 심장이라 일컫는 요르단을 방문했다. 요르단은 ‘왕의 대로’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 ‘야르단’, ‘내려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나와 일행은 요르단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인 왕의 대로를 통과해 와디럼에 도착했다. 왕의 대로를 지나며 굽이굽이 협곡에 시선이 압도되었다. 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사막과 협곡에 시선이 멈추었다.
요르단은 북쪽으로 시리아, 남쪽으로 사우디, 동쪽으로 이라크가 둘러싸고 있다. 요르단의 아카바는, 해안선이 16킬로미터인 유일한 항구도시다. 요르단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해안선 16킬로미터를 확보하는 대신 사막을 사우디에 넘겼다. 사우디에 넘겨준 땅에서 석유가 물 솟듯이 나오는 황금 연못이었음을 알지 못했던 거였다. 요르단은 아랍 국가에서 유일하게 석유가 나오지 않는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땅으로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420미터 낮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은 난민의 도시다. 요르단 인구는 1,130만여 명이 넘는데, 암만에 난민이 60% 이상 거주한다. 팔레스타인 난민이 220만, 시리아 난민이 140만, 그 외 이란, 이라크, 이집트, 아르메니안, 체첸, 체르케스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요르단의 공식적인 언어는 아랍어를 사용하는데 젊은 층은 아랍어와 영어를 사용한다. 요르단에서 이란, 이집트, 이라크 청년 난민들을 많이 만났다. 요르단은 젊은이들을 통해 다양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듯 보이나 그 이면에 많은 변화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요르단의 사막 와디럼은 2011년 세계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생태계와 지형을 위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바위산과 사막의 조화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디럼은 요르단의 유일한 항구도시인 아카바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720제곱 킬로미터의 광대한 지역에 펼쳐진 험난한 지형, 광활하게 펼쳐진 와디럼 사막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지평선에 줄지어 행렬하는 낙타들과 양들이 눈에 띄었다.
유목민 베두인들의 와디럼 텐트에서 1박 2일 광야체험을 했다. 8월에 와디럼 한복판에서 5분 동안 서 있었는데 온몸을 땀으로 샤워했다. 한여름의 열기는 오롯이 피부가 감당할 몫이었다. 지구 밖 다른 별에 온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홍차를 자주 권해서 홍차를 많이 마셨다. 홍차를 많이 마시는 이유는 덥고 건조한 사막의 기후를 견딜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와디럼의 텐트는 호텔 역할을 한다. 한여름의 열기를 막아주고 비가와도 방수가 되는 염소 털로 만들었단다.
그곳에서 베두인들이 준비한 베두인 전통음식을 먹었다. 그들은 숯불을 피운 모래구덩이에 음식 재료를 넣었다. 숯불과 모래의 열로 세 시간 삼십 분 동안 천천히 구워낸 음식으로 우리를 대접했다. 만사포(양고기 찜)와 자미드(염소고기), 카다예프(요르단 만두), 스프 종류와 구이 요리였다. 요리를 만드는 과정이나 광야 생활을 견디는 것이 그들의 삶인 듯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바위산 꼭대기의 노을 풍경이 장관이었다. 별들이 와디럼의 어둠을 마중 나왔다. 별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했다. 도시에서 보이지 않았던 별들이 그곳에서 더 선명하게 보였다. 별들이 쏟아지는 와디럼의 밤 풍경은 경이롭고 신비롭기만 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너 처음 머물렀던 광야의 숨결을 느끼며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그 시간을 여행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과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고 머물렀던 광야를 지났다. 그 땅을 밟으며 광야의 삶을 묵상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구름 기둥으로 그 백성을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그 광야에서 모두 사망했을 거였다. 구름이 머무는 곳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머물다가 하나님께서 이동하라고 하시면 장막을 걷고 이동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순종이 몸에 배지 않으면 한순간도 견딜 수 없는 곳이 광야의 삶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동안 왜 그렇게 불평하고 입술로 범죄 했는지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 시대 그 환경에 있었다면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들보다 나은 점이 없을 거였다.
요르단에서 느보산 언덕에 올랐다. 모세가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입성하지 못했던 그 상황을 모세의 심정으로 상상해 보았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을 들으며 광야를 통과했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그토록 숙원이었던 가나안 입성을 앞두었지만, 결국 그 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느보산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 갈릴리 바다가 보였다. 모세가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경계선에서 갈림길이 되었던 그때의 상황 속에 내가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요르단 땅을 밟으며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의 삶이 오롯이 담긴 광야의 시간과 마주했다.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하신 손길 안에 있다면 더이상 광야가 아니다. 3일 길 앞서 행하시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이레와 주권 안에 있다면 지금 걷는 광야 또한 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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