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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4월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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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숙 사모] 추억의 샘가에서

서정숙사모
시인
달라스문학회회원

비 한 방울 없이 백도가 넘는 고공행진의 달라스. 두 달 넘게 일기예보 보는 것도 지쳤습니다. 잔디는 물론이고 도롯가의 물 없는 곳에서 자란 나무들이 선 채로 말라갑니다.

96년 라디오 코리아(원창호)에서 무궁화 묘목(한국서 공수)을 나누어 줄 때 성냥개비만 한 보라색과 흰색을 받았습니다. 너무 어려서 조마조마했는데 제법 잘 자랐고 이사하면서 삽목해 왔습니다. 뿌리내려 해마다 풍성한 꽃을 피우고 나보다 커졌는데 보라색 무궁화가 발등부터 머리까지 말라버렸습니다. 볼 때마다 물 마시기조차 미안할 지경입니다.

“하나님 말라 죽어가는 나무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셔요? 제발 비 좀 뿌려 주셔요.” 기도도 제대로 못 한 주제에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뒷마당에 텃밭을 일군 남편이 타이머로 새벽과 늦저녁 물주고, 호수로 뿌리쪽에 직접 주지만 어떤 것들은 폭염의 열기로 데쳐지고 마르고 죽습니다.

안타깝고 우울하면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를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와 디트리히 피셔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눈보라 길을 홀로 걷는 쓸쓸한 ‘겨울 나그네’, 계절과 상관없이 영혼을 울리는 노래와 피아노 연주. 낙심하고 주저앉기보다는 ‘삶의 겨울’을 끌어안는 의지와 결단의 노래로 제게 다가옵니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는 어릴 적 엄마가 흥얼거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 마음이 따듯해지고 이어지는 애수 어린 곡들은 20대 때 물리치료사로 구라선교회 사택에 살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이동식 턴테이블로 LP 원판이 닳도록 듣던 겨울 나그네 24곡. “Gute Nacht -굿나잇”으로 시작된 후 “5. 보리수, 7. 냇가에서, 10. 휴식, 11.봄의 꿈”으로 계속됩니다. (위키백과 번역) 남들에게는 생뚱맞겠지만 ‘봄의 꿈’을 들으며 비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뮤직테라피전공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노래의 샘가에서 추억의 치유’라고 할 수 있을는지요.

타주의 명문 보딩스쿨에서도 말썽을 부려 집으로 데려와야만 했던 손님의 아들. 2년간 맘잡고 공부해서 앨라배마의 오번대학에 전액장학생으로 가게 되자 엄마는 아들에게 특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들 신생아 때 입혔던 옷, 어릴 때 너무 좋아해서 벗지 않던 공룡 티셔츠, 닳도록 입던 잠옷, 첫 여름성경학교 티셔츠, 천에 그린 첫 그림, 유치원 때의 운동복부터 고교 마지막 때까지 입던 걸 모아둔 대형박스 3개의 추억의 옷들.

“네가 가장 기억에 남는 옷들을 고르렴, 엄마는 네 추억이 더 소중해. 무엇을 고르던 그것들로 네 퀼트 침대보를 만들려고 한단다.” 하나하나 들추며 감탄하는 아들.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골라놓은 것들로 주문한 지 석 달, 대학으로 가기 하루 전날 퀼트 침대보로 완성되었습니다. 저녁에 침대보 조각들을 손바닥으로 하나하나 숙연하게 쓰다듬던 아들. 엄마보다 더 큰아들이 엄마와 ‘3초간 눈 맞춤’ 후에 “땡큐 마미, 아이러브 유!”. 아들이 속 썩일 때 서로 주고받은 상처가 생각난 엄마도 눈시울이 젖었다고 했습니다. 추억의 조각을 모아서 만든 가족사랑 침대보는 오번 대학 기숙사에서 아들과 함께할 겁니다. 그 엄마의 지난 27년을 아는 나로서도 감동으로 울컥했습니다. 탈무드에서 “현명한 아내는 3대를 행복하게 한다”고 하더니 곁에서 간혹 함께 기도한 나까지 덤으로 행복을 누렸습니다.

사람마다 ‘추억의 샘가’가 다르겠지요. 미주 아동문학가 홍 선생님이 “코로나가 연로한 우리 시니어들을 가두었지만, 이 기회에 우리들의 어릴 적 이야기를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습니다. 짧은 글인 동시와 동시조를 썼기에 긴 글은 엄두가 안 나 시작도 못 한 채 2021년이 갔습니다.

대도시에서 자라 쓸 게 없다고 꽁무니를 빼기도 했지만, 막상 쓰려고 마음먹으니 쓸 게 많더군요. 어린 날을 기억하며 한국의 자매들에게 물으며 글 쓴 경험은 부모님과 형제들을 새롭게 만난 치유의 시간이었습니다. 마음 한옆에 무거운 회색 돌로 눌러 놓았던 엄마를 꼬옥 안아드렸습니다. 이민 30년이 넘는 시니어 여섯 분의 이야기 또한 질곡의 한국 역사와 맞물려 강가에서 찾은 금모래 은모래처럼 곱고 귀한 글들이더군요.

지난 수요일에 넉넉하진 않지만 한 자락 곱게 내린 빗줄기! 생명의 샘이 되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말라서 갈라진 땅과 초목들과 함께 서서 비의 축제에 몸을 맡겼습니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6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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