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환 교수] 인연과 만남과 관계

달라스 국제대학교(www.DIU.edu) 국제학장
달라스 뉴송교회 협동목사
TCN 고문

교회 안팎에서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집사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우리 인연이 보통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우리 인연은 참 오래됐습니다.”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아쉽지만,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 단어가 불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연이라는 단어가 크리스천들의 일상언어의 일부가 되었으니 굳이 그 배경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단어를 대체 또는 보완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 단어에 내포된 의미를 모르고 계속 사용하고 있으므로, 한번쯤 생각해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연은 한자어로서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 또는 씨앗을 의미하고 연(緣)은 그 원인이 작동하도록 돕는 조건이나 환경을 뜻합니다. 이 개념은 불교의 연기(緣起)사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연기란 불교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로서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서로 의지하여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어떤 존재나 사건도 단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이 맞물릴 때 결과물로 생겨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고 다양한 환경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씨앗(因)이 있어도 물과 햇빛과 토양(緣)이 없으면 싹(果)이 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연은 원인과 조건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에서부터 관계 중심적인 개념으로 확장되어 교회 안팎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참 인연이네요.” 이때 인연은 우연을 넘어선 의미 있는 만남 또는 설명하기 어려운 연결감 또는 필연성을 드러내 줍니다. “짧았지만 깊은 인연이었습니다.” 이때의 인연은 시간보다 관계의 밀도를 드러냅니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겠지요.” 이때의 인연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운명적 요소를 나타내어 관계의 신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경우는 인간관계를 “그냥 만났다” 또는 “의미는 있지만 목적은 모른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정서적이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표현에는 인연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인연이니 놓칠 수 없다는 집착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볼 때 감사와 겸손의 자세가 담겨있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집착하지 않아야 함 즉 불교적 무상관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인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의 문제점은 단어 자체보다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세계관과 오해의 가능성입니다. 불교에서 인연은 원인과 조건의 결합이며 비인격적인 질서 속에서 작용합니다. 만남은 자연적이고 운명적이어서 설명할 수 없는 질서의 결과라는 겁니다. 그와 같은 세계관은 성경이 말하는 책임과 선택 그리고 순종과 결단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맥락에서 인연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허락된 만남입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기에 만남도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관계가 발생하는 것은 인격과 신앙을 다듬기 위함이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관계는 사명적이므로 “부르심(Call)”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관계에는 맡김 또는 신뢰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남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탕 위에서 관계의 신뢰가 형성됩니다. 신뢰는 인간의 성실성이나 관계의 안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 기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인연을 조우(遭遇)나 숙명적인 만남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만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 모든 만남과 관계의 배후에 인격적인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인연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사용하시는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부르심 속에서 주어지는 만남으로,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고,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관계입니다. 이와 같은 만남은 관계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 것이고 상대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는 관계입니다. 도망치지 않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을 신학적 정제 없이 반복해서 사용하면 불교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의식적으로 혼합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스천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목적을 망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핵심을 훼손한다 하기보다는 신앙고백의 중심을 점진적으로 흐리게 만드는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누가 하셨는가”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표현은 문장의 주어를 바꿉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행위를 “인연이 닿았다” 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비인격적인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연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보완적인 사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인연이라고 하는 한국말 표현의 정서와 문화적인 친숙함을 존중하되 신학적 중심은 섭리와 부르심과 은혜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인연이라는 단어를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하나님의 섭리와 부르심과 은혜를 바탕으로 재정의하고, 단독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보완적인 표현과 함께 사용하기를 권합니다. 즉, “인연이 있어서 만났습니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런 인연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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