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자식인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잠 10:1)
잠언 묵상 200호까지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잠언 묵상을 작성하면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자료의 부족, 지식의 짦음, 경험의 미천함 때문에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기도 중에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이제 짧은 격언으로 이루어진 10장부터의 말씀을 묵상하려니 사실 걱정입니다. 첫 번부터 ‘어떤 자식인지’를 묻는 질문에 정말 오래토록 기도하고 묵상하다가 주님이 깨우쳐 주심에 따라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혜로운 아들이었는지, 미련한 아들이었는지. 나는 부모를 기쁘게 해드린 자식이었는지, 근심이 되는 자식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6.25 전쟁 참전 용사로서 강원도 동부 전선을 따라 전투를 수행했는데 전투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서 풀뿌리를 씹으며 온갖 고생을 다 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고생을 하다보니 몸은 쇠약해지고 병약해져서 집으로 돌아와서 고생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6년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 29살에 청상과부가 된 것입니다. 삼남매와 함께 살아보겠다고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다가 야채 가게를 마련하였습니다.
저는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돕기 위하여, 신촌 당인리 들판에서 채소를 손수레에 한가득 싣고, 또는 서울역 청과물 도매상에서 물건을 받아 5km를 넘게 실어날랐습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돕기 위하여 학교에서 돌아오면 장사를 하고, 주변에서 맴돌면서 지켜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러한 큰아들에게 고마워하고 칭찬하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에게 남자가 생긴 것입니다. 아직도 새파랗게 젊은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때부터 관계가 어색해지고 격이 생기면서 그분을 아버지로 인정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아저씨였고 어머니 말대로 ‘꼰대’였습니다.
집을 떠나기 위해 신학교 기숙사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여 연락이 끊기게 되었습니다. 수소문하여 집을 찾아갔을 때에 어머니는 아들이 왔다고 진수성찬을 차려 방에 들여놓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는 밥상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젊은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한 옹졸함, 개척교회를 한다고 어머니의 도움만 받아왔던 것, 목회에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찾아뵙지 못하고 섬겨주지 못한 것,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집에 모시고 섬겨주지 못한 것…등등을 생각하며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나는 분명 어머니 앞에 착한 아들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시는 어머니를 품어주지 못한 옹졸한 자식, 불효 자식이었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어린 우리들 데리고 고생 많이 하셨어요.”
“주님! 못난 자식을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자식들은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We build people 김성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