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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5월 21, 2024

[허재석 목사] 평범하게 비범합시다

킹덤에듀케션 미니스트리(KERG ministries) 대표 허재석 목사

예수님의 성육신

성육신(incarnation)이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원래, ‘incarnation’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개념이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실체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등장하는 잔인한 악당을, 우리는 ‘악의 화신’(the incarnation of evil)이라고 부릅니다. 즉, 사람들은 ‘악(evil)’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정말로 실체가 되어 나타난다면 저런 모습이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부릅니다. 이처럼, ‘incarnation’이라는 단어는 중립적인 표현이어서,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무엇을 ‘incarnation’하느냐입니다.

요한 1서의 첫 부분은 예수님의 오심을, 성육신(incarnation)이 아닌, 다른 단어로 설명합니다.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라고 표현합니다. 한글 성경에서 “나타나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네루”(φανερόω)는 본문에서, “시각적으로 보이게 되다” “드러나다” “선명하게 알려지다”등을 뜻합니다. 즉, 요한과 사도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은 관념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경험했던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성육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관념적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일상의 언어를 사용해 “평범함을 입은 비범함”으로 정의해 보려고 합니다.

평범함을 입은 비범함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볼 때, 그분의 가르침, 이적들, 희생과 섬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모두 ‘비범함’에 속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그 비범함을 평범한 인생의 그릇에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눈먼 자를 어루만지시는 손길에서, 사마리아 땅을 밟으시던 흙 묻은 걸음에서, 종교지도자들의 불의에 맞선 분노에서, 십자가 위의 무력한 마지막 숨결과 부활의 숨결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과 예수 생명의 비범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비범함을 인생의 평범함의 그릇에 너무나도 비범하게 담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던 초대교회는 어땠을까요?

평범함 속의 비범함: 신약성경의 리더 선출 기준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들도 오늘날 우리처럼 많은 문제들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제시된 교회 리더 선출의 기준은 그들이 어떻게 평범함 속에 예수 생명의 비범함을 담으려고 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디도서, 디모데후서의 장로 및 집사 선출의 포괄적인 기준들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됩니다.

(1) 가정생활: 좋은 남편과 아버지

(2) 인격: 좋은 대화 상대, 분노 조절, 신중함,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

(3) 경제 윤리: 정직, 청지기

(4) 사회생활 및 인간관계: 나그네 대접, 선행, 비기독교인들에게 칭찬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소위 종교적인 활동들을 선출 기준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것은 기본이기에 굳이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신약성경은 교회에서 비치는 모습만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함에서 나타나는 모습(비기독교인의 평가를 포함)을 리더 선출의 조건으로 제시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를 잘 요약하여, 디모데전서 3:9은“깨끗한 양심에 신앙의 신비를 가진 사람”이 교회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기독교의 비범한(extraordinary) 진리를 일상의 평범한 (ordinary) 현장을 통해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한 교회의 리더 선출의 기준은 그들이 생각하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많은 현대 교회들이 교회에서 행해지는 활동들(예배, 사역, 헌금, 새벽 기도 등)만을 기준으로 리더를 선출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들이 교회에서의 활동과 일상에서의 활동을 구획하여 나누고, 교회에서의 활동에만 비범함(거룩)의 이름표를 붙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그들이 성숙한 신앙에 대하여 예수님의 길, 초대교회의 길과 멀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의 신비: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린도 후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 그 보배를 질그릇과 같은 자신 안에 가졌다”고 고백합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이방의 제사에는 황금으로 만든 잔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바울이 말한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비범함이 질그릇과 같이 약하고 평범한 그릇에 담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의 평범함(ordinary) 속에서 자신의 비범함(extraordinary)이 나타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힘을 가지면 자신의 건물을, 예배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비는 교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신비롭게 만드는 데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신비는 ‘질그릇’들의 평범함의 행간 사이로 하나님의 영광의 비범함이 뚫고 나올 때, 비로소 그 찬란한 빛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예수님 때도, 지금도 동일합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은 순종하시며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심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셨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동일하게 자신들의 평범한 삶을 통해, 예수 생명의 비범함을 나타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허락하신 일상의 지루하고 고단한 평범함 속에서 예수 생명의 비범함이 드러나는 그 신비를 조금이나마 더 알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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