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은 30 조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세포의 핵에는 30억개의 DNA 염기 서열 (DNA nucleotide sequence)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 유전체(Genome)가 있다. 30억개의 염기 서열은 유전자의 알파벳으로 비유될 수 있겠다. 그럼 30억의 알파벳은 어느 정도의 분량이 될까?
미국에서 출판되는 책들의 경우 한 페이지에 평균적으로 3000개 철자가 담겨있다고 한다. 만약 1000 페이지가 되는 두꺼운 책을 만든다고 할 경우 30억개의 염기서열은 10,000권의 책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또한 한 사람이 평균 일분에 60 단어를 타이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이 매일 8시간 쉬지 않고 50년을 일해야 겨우 쓸 수 있는 양이기도 하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세포의 DNA를 연결한다고 한다면 670억 마일의 길이가 되고 이는 지구와 달 사이를 15만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가 된다고 하니 사람이 지닌 DNA의 양적 방대함에 놀랄 뿐이다.
그럼 사람의 방대한 DNA에는 얼마나 많은 유전자가 있을까? 참고로 유전자란 단백질을 발현할 수 있는 DNA 조각 (Fragment)을 말한다. 인간의 DNA에 어떤 유전자가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 1990년도부터 2003년까지 생물학적 국제 공동연구 사상 가장 큰 연구 프로젝트인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미국의 주도로 진행됐다. 3조 달러를 투입하여 13년간의 지속된 공동연구를 통해 인간을 유전정보 차원에서 정의하는 설계도가 세상에 드러난 셈이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사람이 적어도 10만 개 이상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훨씬 적은 2만 개 정도의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자동차 한 대의 부품 수를 작은 나사 하나하나까지 세어보면 평균 3만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인간이 자동차보다 복잡한 정도에 비해 너무나 적은 수의 유전자였다. 30억개의 염기 서열로 이루어진 DNA 정보의 양에 우리가 첫 번째로 놀랐다면 그에 비해 턱없이 적은 유전자 수에 두 번째로 놀라게 된 것이다. 아니 이 적은 수의 유전자로 인간의 모든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 있는 유전자의 질적인 능력에 세 번째로 놀라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DNA가 물리적으로는 가느다란 실과 같은 1차원 구조이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유전자의 질적 차원은 헤아릴 수 없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정보라는 이야기이다. “DNA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어떤 소프트웨어보다 훨씬 더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의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DNA는 100% 디지털 코딩 정보이다. 컴퓨터가 0과 1을 사용하는 2진 코드(Binary Code)를 사용한다면 DNA는 ATGC로 표현되는 4개의 염기를 사용하는 4진 코드(Quaternary Code)이기 때문이다.
세포의 안팎은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복잡하고 혼돈스럽지만 그 속에서 생명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며 질서를 유지해간다. 2만 개 남짓한 유전자들이 독특한 자신의 본질적인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상황에 따라서는 항상성을 위해 반대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을 뿐 서로 경쟁하거나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다른 단백질들과의 만남에는 특이적 의미가 숨어있으며 유전자 발현을 통해 자신이 언제 등장하고 언제 퇴장할지 잘 알고 있다.
유전자 발현이라는 소환 과정을 통해 나온 단백질은 “생명(生命)”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살라는 명령”을 받들고 그 소명을 다한 후 사라진다. 그것이 내가 가진 유전자가 가르쳐주는 생명이다. 유전자에게 심지어 우리 삶의 숭고함을 배운다.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의미는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세대가 거듭되면서 전쟁과 기근, 핍박과 자연재해, 질병과 사건 사고가 있어 왔으나 내 직계 조상들 중에는 어느 누구도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건네주는 일에 단 한 번의 실수나 실패 없이 완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전백승의 전적을 보유한 이 유전자가 지금 이 시대에 천문학적 수에 가까운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나를 택했다는 사실은 오늘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