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uston Graduate School of Theology(D.Min)
Central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겸임교수
어떤 이들은 교회에 예배가 너무 많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주일 낮, 주일 오후, 수요예배, 새벽예배, 구역예배, 금요기도회 등을 나열하며 “아직도 옛 방식을 고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적 비판과 상관없이, 예배이든 기도회이든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 성도들이 부지런히 모이는 것은 성경적이며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는 성도라면 예배가 많을수록 복된 것임을 압니다.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우리는 자주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이웃과의 최고의 섬김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연말 목회증후군으로 등장하는 세트메뉴 두종류가 있습니다. “못한다. 할 수 없다. 안한다.”와 “바쁘다. 힘들다. 피곤하다.”입니다. 두가지 모두의 결론은 주님의 교회일에 피하는 자가 되고, 눈에 띄지 아니하고, 마침내 신앙이 병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 핑계를 대지만, 예배와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사단 마귀가 좋아할 선택으로 기울어질 따름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너무 바쁘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실 바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신앙을 덜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쁨은 핑계일 뿐이고, 마음의 우선순위가 이미 다른 곳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빠서 못 합니다’가 아니라, ‘덜 중요하게 여깁니다’라는 고백이 더 정직한 대답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학교에 늦는 것은 절대 양보를 안합니다. 조금만 늦어도 큰일 나는 것처럼, 때로는 아이를 다그치고, 차를 급히 몰고, 죽기 살기로 학교 시간에 맞추어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 예배 시간은 어떻습니까? 5분, 10분 늦어도 별일 아닙니다. 긴장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예배의 우선순위가 밀려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돈에 굉장히 예민합니다. 은행에 몇 시까지 입금해야 ‘레잇 피(Late Fee)’가 붙지 않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람을 2개, 3개씩 맞춰놓고, 설령 회의 중이라도 틈을 내어 입금을 합니다. 왜입니까? 돈이 피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헌신은 이런 긴급함과 필사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건강을 또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병원 예약 시간은 절대로 넘기지 않습니다. 병원이 몇 시까지 오라고 하면, 우리는 그 시간에 맞추기 위해 긴장하며 움직입니다. 혹시라도 늦을까 봐, 일찍 도착해 대기하기도 합니다. 왜입니까? 건강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에는 이런 마음의 준비가 잘 없습니다. 영적 건강보다 육체의 건강이 더 우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중요함을 거꾸로 붙들고 사는 삶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병들면 우선순위가 뒤바뀝니다. 우선순위가 뒤틀리면 신앙이 병들고, 예배가 흔들리면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반대로 예배가 회복되면 우선순위가 회복되고, 인생이 바로 서며, 성경이 약속한 복된 삶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예배가 복의 출발점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했습니다(삼상 7:5-10). 그때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보내셔서 블레셋을 물리치게 하셨고, 나라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예배가 승리의 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반대로 나답과 아비후는 잘못된 예배로 즉시 죽임을 당했고(레 10장), 가인은 왜곡된 예배로 버림을 받았으며(창 4장), 사울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방법을 어긴 제사로 왕위를 잃었습니다(삼상 13장). 예배의 성공은 인생의 성공, 예배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로 이어집니다. 예배는 복 있는 삶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신앙의 위기를 호소합니다. 그러나 근본적 위기는 정체성의 상실, 즉 예배자의 뿌리를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이유는 예배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부평초처럼 뿌리 없이 떠다니는 영혼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예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다리를 오르기 전에 받침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야 하듯이, 신앙의 뿌리는 반드시 예배에서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예배가 뿌리가 바로 세워질 때 성장하고, 그늘을 만들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백성이 정체성을 잃을 때마다 하나님은 예배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했고(왕상 18:30),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누웠던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 고백했습니다(창 28:17). 예배의 회복이 바로 인생의 회복이었습니다.
예배는 복된 인생의 시작이며, 신앙의 중심이며, 모든 회복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와 예배를 회복의 통로로 주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 정한 시간과 정한 장소-하나님의 마음과 눈이 머무는 그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이며, 믿음이 다시 살아나는 자리이며, 복이 흘러들어오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의 자리와 시간을 가볍게 줄여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한 교회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성장하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모일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자, 예배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예배 시간을 더 늘리고, 가능한 한 모든 성도가 예배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결단과 몸부림을 기쁘게 보시고, 그 교회에 오히려 부흥의 은혜를 더해 주셨습니다.
이민교회들은 어렵고 힘들다는 고백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질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영혼들을 어디에 보내시겠습니까? 예배를 중심에 두고,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담대하게 사역을 펼치는 교회, 비록 여건은 부족해도 예배만큼은 놓치지 않으려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영혼을 보내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 형편과 사정에 맞추어 예배를 줄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선택이 아닙니다. 예배가 살아 있을 때 교회는 살아나고, 성도는 회복되며, 사역은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를 더욱 아름답게 세워 가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