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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2월 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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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영렬 목사]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기영렬 목사(달라스 드림교회 담임)

신학교 시절 같은 반 전도사님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전도사님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내 믿음을 테스트해 보나 하는 마음이 들어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내게 해줄 줄 조언이 있으셨나 보다 생각하면서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는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전도사님은 어떻게 그 확신을 얻으셨습니까?” 그 전도사님은 교회에 헌신적이고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분이었지만 아직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는 이현수 목사님의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10년 넘게 한인교회를 다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구원이나 거듭남에 관한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다.” 나중에 이 목사님은 목사가 되고 나서 구원의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구원과 거듭남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느 날 한 집회에서 구원에 대해 선포하고 오늘 예수님을 처음으로 구주로 믿기로 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으신 분들 손을 드세요 했더니 절반이 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모임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집회였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구원의 진리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그럼에도 많은 성도가 구원의 문제에 관해 관심이 부족하고 확신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가 성도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전제하에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매주 구원의 복음만 전하는 것도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이 없이 형성된 신앙생활은 율법적인 종교생활로 변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믿음이 구원 확신의 토대 위에 있기를 강조합니다. 이는 운동의 기본기처럼 필수적입니다. 수영, 골프, 탁구, 테니스 등의 거의 모든 운동 경기 종목은 탄탄한 기본기가 중요합니다. 기본기 없이 선천적 운동신경으로 어느 정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지만, 어느 순간 한계에 도달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기가 중요한데 그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미식축구의 전설인 빈스 롬바르디 감독은 슬럼프에 빠져 고전하던 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구공입니다” 기본 중에 기본부터 시작하고 다지자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의 기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두 가지 질문을 통해 점검할 수 있습니다. 전도폭발에서 사용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밤 당신이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입니다.
이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일단 단단한 기초 위에 올려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면, 기본적인 믿음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속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속이란 내 죄 대신 제물이 대신 죽음으로 나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원리입니다.
이사야 53:6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예언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심판받아야 할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은 대속의 원리를 잘 설명해 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집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죽음을 피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집에 맏아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이미 어린양이 맏아들을 대신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희생된 예수님의 대속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고백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민수기 21장의 장대에 달린 놋뱀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이야기하면서 인용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는 장대에 놋뱀을 달아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아날 것이라 명령했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저주를 대신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2~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선물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내 마음의 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고, 예수님의 받으신 저주가 나의 저주가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요한일서 5:13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자녀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가장 중요하고도 복된 신앙 여정의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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