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영광 –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

며칠 전 밤에 제가 어느 공동묘지에 있는 꿈을 꿨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이제 그만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이 사람이 말로만 듣던, 검은 갓에다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나는 그분이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다만, 제가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런 복장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제가 목사이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 제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때 드는 생각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죽는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박사 논문을 마저 마쳐야 하는데…” “이번 주일 설교 준비를 아직 다 끝내지 못했는데…” 하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깼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제가 말기 암이라서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으니 퇴원하고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꿈에서도 집사람과 아이들이 걱정할 것 같아서 사실을 숨기고 퇴원하려고 하다 잠에서 깼습니다.
평소에 제 꿈은 소위 말하는 “개꿈”인 경우가 많아서 무슨 꿈을 꾸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왠지 개운하지 않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고, 주일 예배 후에 있는 성경 공부 시간에는 욥기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저희 교회 성경 공부는 교재를 가지고 괄호 넣는 방식이 아니라 성경 읽기표의 순서를 따라서 한 주 동안 성경을 읽고, 느낀 점, 성경을 읽다가 궁금했던 점, 우리 삶 속에서 적용할 점을 나누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집사님 중 한 분이 “그래서 욥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셨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시는 목사님께서 욥기는 죄가 없는 의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움과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밤이 늦은 시간에 저와 함께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목사님 – 네브라스카 링컨이라는 곳에서 한인 침례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님이기도 합니다. – 으로부터 카톡 하나가 와 있었습니다. 전날 밤인 토요일 밤에 사모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는데 안타깝게도 가망이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도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다음 날인 월요일 – 9월 4일 – 오전에 그 목사님으로부터 다시 카톡이 왔습니다. 그날 낮 12시경 의사가 뇌사 판정을 내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음 날인 화요일 – 9월 5일 – 오후 호흡기를 제거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안타깝고 당황스러운 상황인데, 불과 하루, 이틀만의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정이 둑이 무너지고 갑자기 밀려드는 물에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떠밀려 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번에 달라스에 오셨을 때 얼굴이라도 뵙고 식사대접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하는 자책의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박사 논문을 열심히 써서 이번 겨울 꼭 같이 졸업하고, 졸업식 끝나고 나서 그 목사님 부부와 저희 부부가 함께 식사하며 회포를 풀자는 약속도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드는 질문, “그런데 어떻게 이러실 수 있을까?” 성경 공부 시간에 목사님 말씀대로 아무리 욥기 결론이 죄가 없는 의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목사님의 이러한 상황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네브라스카 링컨, 한국 분들도 별로 없는 곳에서 쉽지 않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묵묵히 주님의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분들이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다고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을까? 목사님과 사모님에게는 11살 늦둥이 아들도 있다고 하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물론 잘 압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아무리 죄가 없는 의인, 욥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런데 저는 꿈에서 죽어야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렇게나 당황스러웠는데 “목사님은 준비할 시간도 없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성경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현실이 되고 보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 안에 살면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슥 2:5)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그곳에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기 때문에 현재의 형편과 상관없이 지극히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어떠함, 현재의 상황, 형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만 영광스럽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영광스러운 삶, 소망스러운 삶을 바라고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소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