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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1월 23, 2024

[조장호 목사] 자연에서 만난 하나님 (2) – 타조

조장호 목사
웨이코한인교회 담임

하나님은 욥기의 마지막에 나타나셔서 욥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하십니다. 그 긴 대답 속에 여러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타조에 대해서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욥39:13-18)

타조는 새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크고 우악스러운 동물입니다. 괴성을 지르며 날갯짓하며 뛰지만, 여느 새처럼 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 날개 또한 무슨 고상한 자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위의 말씀에 의하면 타조는 자식을 돌볼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알을 낳아서 잘 간수하는커녕 흙 속에 아무렇게나 두고는 그것이 살든 죽든 관심이 없습니다. 새끼에게도 모질게 대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종종 자식을 무관심하게 키우는 부모를 타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타조의 무관심이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밝힙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이 타조에게 주신 것들도 있습니다. 비록 그 날개가 우아하지도 않고, 그 날갯짓이 정교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타조에게 날갯짓하는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에는 촌스러워 보일지라도 타조는 당당히 날갯짓을 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타조에게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조가 일단 뛰면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말과 그 위에 탄 자”라는 표현은 출애굽 할 때, 애굽의 말과 기병들을 가리킨 표현입니다(출 15:21). 애굽은 최상품 말의 생산지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타조에게 그런 애굽의 말들과 그 위에 앉은 애굽의 장군들을 우습게 여길 정도의 힘과 에너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어떤 다른 피조물들 중에서 찾을 수 없는 특출한 것이지요. 학이 제아무리 아름다운 날개를 가졌다하여도, 혹은 독수리가 제아무리 강한 부리를 가졌다 하여도, 타조의 힘과 에너지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타조를 가까이서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어릴 때 동물원에서 보고, 미국에 와서는 animal farm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을 뿐입니다. 타조가 힘차게 달리는 것은 더더욱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타조의 영광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게 타조는 그저 우악스럽고 우습게 생긴 커다란 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욥기의 하나님은 타조에 대해 욥에게 말씀하시며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타조가 자기 새끼를 간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놈들에게 지혜를 주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그놈들이 작정하고 광야를 질주하는 것을 보았느냐? 그것들의 힘과 에너지를 보았느냐? 바로 내가 그녀석들에게 그런 영광과 아름다움을 주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것들에 대해 변명하지 않으십니다. 피조물들에게 있는 약함, 부족함, 미련함 들을 하나님은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름의 영광, 나름의 아름다움을 각각의 피조물에게 주셨고, 그들 각각을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께 자기 인생이 왜 이 모양이냐고 탄원을 쏟아놓다가 급기야는 이 세상이 왜 이러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욥에게 난데없이 까마귀 새끼를 광야를 달리는 타조를 말씀하시며, 자랑스러워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아름답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고 계시는 까닭입니다. 까마귀 새끼가 눈도 뜨지 못하고 고개를 쭉 빼고 있으면, 하나님은 어미 새를 통하여 그 어린 것들을 먹이십니다.

타조가 바보같이 자기 알들을 돌보지 않고 뛰어다니지만 하나님은 그 알들이 다 부서져서 타조가 멸종되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타조에게는 자식을 잘 돌볼 지혜가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의 새끼를 돌보십니다.

우리는 타조가 저렇게 부주의 해서야 자식들이 다 없어지는 것 아닌가 걱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이 살아서 자기 어미처럼 광야를 질주하기까지 돌봐주십니다.

그렇게 그 촌스럽고 덤벙대는 타조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상의 일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이 연약함과 미련함으로 소멸되지 않도록 돌보십니다. 동시에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각각의 피조물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좋다 하십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없는 것으로 늘 자신을 비하하고 뒤처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학같은 깃털과 독수리 같은 매서움과 타조와 같은 힘과 에너지를 가 한 몸에 가진 새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봐라, 그 촌스러운 타조에게도 그 어떤 것도 따라 할 수 없는 힘과 에너지를 내가 주지 않았느냐! 그것은 내게 아름답고 영광스러우니라. 타조가 자신의 촌스러움과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자랑스럽고 아름답다면, 오늘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보시겠습니까?

그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럽게 자랑스럽게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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