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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4월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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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영 목사] 이스라엘의 신앙전수의 실체

안지영 목사(나눔교회 원로목사)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부교수

로스앤젤레스에 “예시바”라는 유대인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나는 이 학교를 참관한 적이 있습니다. 나눔교회를 시작하면서 세대 통합 예배를 시도하였지만 모두가 한마음이 된 것은 아니었기에, 나 나름대로 해결점을 찾기 위한 돌파구였지요. 그 학교 도서관과 교실에서는 학생들끼리, 선생과 학생들 사이에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더군요. 마치 시장 바닥 같았지요. 구약성경과 탈무드 등을 테이블 위에 펼쳐 두고,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우리 집에서 아이들과 성경 말씀을 가지고 토론했던 것과는 확실히 그 강도가 훨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또한, 안식일에 유대인 가정을 방문하여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 안식일 의식을 관찰하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식사 후에 이웃집 가족이 방문하여 함께 교제하게 되었는데,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모여 대화하는 모습이 참 색다르더군요.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서, 우리 일행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더군요. 자기들 안식일 저녁에 이방인의 방문이 매우 이채로웠나 봅니다. 특히나 선교사로 살았던 나의 얘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더군요.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서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아이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궁금한 걸 물어보면서, 부모에게 다시 설명을 요구할 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보충 설명을 하는 장면도 아직 생생하네요. 어쩌면 이런 게 당연한 건데, 우리 대부분은 이런 친절한 어른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경하게 느꼈던 게 아닌가 합니다. 뭘 물어보려면, 바쁘다고 밀어내고, 어른들 말하는데 끼어들지 말라면서 밀어내는 장면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가요?
더 알아보니, 유대인들도 정통파와 개혁파로 나누어져 있더군요. 개혁파는 더 이상 유대 전통을 따르지 않는 개방된 유대인들이고, 정통파는 유대의 전통을 지키는 그룹이라 하더군요. 이들 중 정통파 유대인들의 삶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자기 나라를 잃어버린 채 2천 년 세월을 나그네로 살았는데, 자기들의 정체성을 그 오랜 세월 동안 보존해 온 노력을 귀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이들도 이렇게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각성을 하게 된 뼈아픈 계기가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들여다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수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이 말하는 “부모를 공경하라”의 의미는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온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들에게 전수되어야 하는데, 그 의무는 부모에게 있고, 자녀들은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요. 이것을 돌려 말하면, 부모는 자녀들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자녀들은 그 가르침을 존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첫 책임자는 부모라는 거지요 제사장 외에 율법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부모에게 있었던 겁니다.
또한 이런 율법과 규례를 다음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언급한 내용이 신명기 6:7에 있더군요.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는 걸까요? 그건 신 6:4-5이 말해주더군요.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새번역)
이 본문을 보면, 다음세대를 가르치는 가장 기초 단위가 가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신앙 양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거지요. 일상의 생활이 이뤄지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 말씀에 따라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할지 묵상하고, 논의해서 자녀들의 신앙을 이끌어가라는 겁니다. 여기에서도 기본적으로 모든 부모가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해야 하는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으로 양육하는 기술을 따로 훈련받아서가 아니라, 매일 어느 곳에서든지 말씀을 묵상하라는 겁니다, 또한 그 묵상을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가족 안에서, 혹은 마을 공동체 그룹 안에서 하라고 한 거지요. 악인의 길에 서지 않고 의인의 길을 선택하는 연습을 반복적이며 지속해서 해 나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책임이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고 마을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이스라엘이 부패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만 질책하신 게 아니라, 일반 백성도 꾸짖으셨더군요. 이스라엘의 부패는 지도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요(사 1:24; 2:6; 3:5; 렘 5:12; 6:10-13). 이렇게 된 이유가 저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고 사사기는 지적하고 있습니다(삿 2:10 12). 저들은 가나안 정복 시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셔서 이 땅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던 윗세대가 사라지자, 역동적으로 생생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자기 세대에서는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한 걸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의무를 느끼지 못하게 된 거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가나안 땅에 비를 내려 풍성한 수확을 준다는 바알 신상이 더 분명한 신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현세대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경험하지 못할 때 그들은 하나님 대신 다른 신들을 찾게 된 거지요. 자기들의 조상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현재에도 생동감 있게 경험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잃어버리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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