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5년전 C국에 가서 한달간 대학캠퍼스에 머물려 단기선교 사역을 한 적이 있다. 신앙의 자유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교회가 핍박을 받는 곳이었지만, 오히려 복음은 역동적으로 전파되고,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갔었는데, 예배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다음 예배시간까지 1시간 이상을 밖에서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1시간 넘게 더운 여름에 서서 기다려야 하는 말할 수 없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배 장소에 들어가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딱딱하고 불편한 나무의자에 피아노는 커녕 그 흔한 기타도 하나 없었다. 멋진 음향시스템도 파워포인트도 없이, 마이크 하나가 전부였다. 찬양인도자가 나와서 첫 음을 잡아주면 다 같이 반주없이 아카펠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뜨겁게 찬양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섬기기 위하여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었다. 한 시간씩이나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감사함으로 예배드리며 섬기는 사람들을 보고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최근에 한국에서 잘 알려진 찬양 사역자 한 분과 통화를 했다. “요즘 한국에는 평일에 찬양 집회를 한다고 하면 잘 모이질 않습니다. 찬양 집회 뿐만 아니라, 평일에 모이는 수요예배나 금요기도회에도 성도들이 많이 나오지 않아요. 큰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잘 모일 수 있는 주일예배 시간에 찬양사역자를 초청하는 교회들이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22년전, 한국을 떠날 때 가지고 있던 한국교회에 대한 이미지와는 너무나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라고 하면 늘 모이기에 힘쓰고 모이면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며 헌신된 교회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해외에서 선교사로 섬길 때도 이러한 헌신된 한국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라는 자부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안에는 헌신이라는 단어가 사라져 가고, 섬기기 보다 점점 더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정말 그런 것 같다. 멋지게 꾸며진 쾌적한 예배당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최고의 사운드 시스템으로 최고의 찬양팀의 찬양과 최고의 설교자의 설교로 은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지 않는가? 적당하게 섬기고 더 많이 섬김을 받으려 하며 자신의 기대가 채워 지지 않고, 좀 불편하면 교회에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고 하면서 불평하지 않는가?
이전에 고 하용조 목사님이 이런 지적을 한 적이 있다. ‘요즘 너무 신사적으로 예수를 믿으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신사적으로 예수를 믿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깔끔하고, 멋지게,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식으로 예수를 믿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방식을 깨끗함과 편안함이 아니다. 우리의 손을 더럽히고, 우리의 옷을 더럽힘으로 지극히 불편함을 감수하며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6-8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이시면서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명예와 권리를 다 내려놓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복종하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만해도 얼마나 불편하셨겠는가?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시고 복종하셨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존귀한 자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하신 이 예수님이 우리도 이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마16:24-26) 구원의 기쁨과 감격으로 기꺼이 희생하고 섬기는 삶을 살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사적으로 깨끗하고, 존경받고, 편안하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손과 옷을 더럽히고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영적인 소비자들이 되는 것을 멈추고, 희생하며 섬기는 예수의 참제자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