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칸사 제자들교회 담임(2003-현)
경북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B.A/M.A)
고려신학대학원 졸(M.Div)
Missionary Baptist Theological Seminary(Th.M) Houston Graduate School of Theology(D.Min)
Central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겸임교수
▶ 모이지 않는 예배와 교회
교회의 본질은 예배입니다. 교회가 반듯하게 서 있어 보여도 예배가 없거나 희미하면 무너진 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배가 없어지면, 교회는 곧 무너져 내립니다. 예배가 없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도들이 교회로 나아와 더 이상 예배로 모이지 않음을 말합니다.
성도가 예배를 위해 교회를 나오지 않으면 교회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가 모이지 않으면, 교회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쩌든지 성도들로 하여금 모이기를 힘쓰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형편과 사정과 처지를 말합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질은 입장을 백번 천번 바꾸어도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예배를 위해 교회 앞으로 나아오고, 힘써 예배드림으로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마침내 세상의 변화를 주동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도 공급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참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와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역자는 당연히 성도들을 예배의 처소로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성도는 예배시간에 예배의 장소로 몸을 가지고 나아옴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성도가 모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향해 자기 마음 하나 지키지 못하는 믿음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고자 하는 악한 욕심의 발로를 드러낸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에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자신의 영혼과 가정과 가문, 자손들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요 도구임을 아는 그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무너지고 교회를 세워가지 못함으로 피폐해져가는 자신의 삶을 일으켜 세우지를 못합니다. 결국, 평생 그 좋으신 주님을 믿는다 말하면서도 참된 신앙의 열매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 몸이 교회로 오는 예배
몸이 교회 오는 것이 진짜 예배, 참 예배입니다. 예전에 믿음 좋으신 분들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버선을 두 개 호주머니에 넣고서라도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그런 분들이 집안에 계실 때, 그가 섬기는 교회나 그 가정과 가문, 자녀들 가운데 복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왜 그런 간증들이 없는 것일까요? 시대의 악함도 문제겠지만, 몸을 가지고 교회로 오지 않으니, 예배가 무너졌으니, 삶에도 영혼의 힘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버려진 듯 살게 된 것입니다.
시시한 장소 심리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영으로 예배한다고 변증하듯 말합니다. 꼭 몸이 갈 필요가 있느냐? 마음과 정성으로 드리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예배가 몸을 드리지 않고 가능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으로 예배할지라도, 우리가 이 땅에서 육체를 가지고 물질계를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이 몸을 움직여야만 하고, 그때 비로소 진짜 영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됩니다.
영으로 예배한다고 하지만, 영과 몸이 분리되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이 하나된 산 자(者)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 거룩한 예배의 처소, 교회
저는 건물 지상주의자가 아닙니다. 교회 건물은 얼마든지 부수고 허물고 더 좋게 지을 수도 있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건물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미신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동안, 그곳은 거룩한 구별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사랑할 때,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핍박했을 때,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주님을 만난 적도 없고, 그를 해치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교회를 핍박했을 따름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를 사랑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해치고 핍박하는 것은 곧 주님을 해치고 핍박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 생활에 구별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나 하나님이 계시기에,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우기지 않습니다.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인데 굳이 주일에만 예배해야 하느냐고, 어리석게 항변하지도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다면, 술집이나 식당에서도 가능할까요? 아마 그곳에서 크게 주님을 부르며 기도하면, 주님이 찾아오시는 게 아니라, 웨이트가 달려올 것입니다. “손님,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혼돈스럽지 않겠습니까? 울어도 교회에서 울고, 졸아도 교회에서 졸고, 교회에서 예배를 시작하고 예배를 마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 방주, 보이는 교회 안으로
노아의 방주는 교회의 모형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정신과 영혼이 아무리 배 안에 있어도, 방주의 문이 닫히면 배 밖의 사람은 죽게 될 따름입니다. 가정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장소에서 모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지, 가족이 만나지 못하고 늘 흩어져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마도 가족이 아니라 노숙자의 모임이 되거나, 나중에는 이름뿐인 그 가정은 해체되고 말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그저 건축물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며 교회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이들이 많음을 봅니다. 교회를 사랑하자고 하면, 자신들이 교회이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사랑하자는 사람을 오히려 ‘건물지상주의자’처럼 취급하는 것을 봅니다.
말씀대로의 삶이 아닌, 마음대로의 삶입니다. 결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교회 안에 모든 좋은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