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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4월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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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수 목사] 예배생활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담임(2003-현)
경북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B.A/M.A)
고려신학대학원 졸(M.Div)
Missionary Baptist Theological Seminary(Th.M)
Houston Graduate School of Theology(D.Min)
Central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겸임교수

▶ 은혜, 교회와 예배
티벳에서 선교를 감당하시는 어느 선교사님이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그곳은 물이 귀한 곳이라 사람들이 잘 씻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이 교회를 왔다 가고 나면 오랫동안 그 냄새가 아주 지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냄새가 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알아보니 저들이 은혜를 받았을 때부터 그런 변화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절로 교회 오는 모습이나 예배드리는 모습이 바뀌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도 바뀌고, 걸음걸이도 바뀌고, 옷 입는 것도 바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참된 변화는 오직 은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말씀과 성령, 예배를 통해서 은혜도 받고 새롭게 되어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이 들려지는 곳, 성령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몸이 나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성전에 모든 좋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살아나고 교회가 살면, 인생의 모든 문제로부터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무엇보다 교회 생활과 예배 생활이 분명해야 합니다.

▶ 홀로족, 개인주의
그런데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교회 중심, 예배 중심의 신앙이 많이 무너졌습니다. 특히, 홀로족(族)으로 표현되는 개인주의 사상이 득세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인주의와 결코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그 좋은 예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주고자 몸살을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게 좋은 예수님,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님을 믿고서도 입을 꾹 다물고 혼자만의 신앙생활을 고수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독하리만큼 선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을 보면, 주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그 자신과 그 가정과 가문의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 좋은 예수를 믿었는데, 어떻게 남편에게, 자식에게, 이웃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홀로 거룩하게 말씀 보고 기도하고, 성경 보며 혼자 잘 믿어본다는 것은 애초에 좋은 신앙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 편리족, 편리주의
신앙의 개인주의와 더불어 득세하는 것이 편리주의입니다. 굳이 교회를 가지 않아도, 코로나 시기에 영상예배를 드렸음을 생각하며, 여전히 침대 앞 속옷 차림으로 전화기로 예배를 드리겠다는 이들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아오라고 하면, 코로나 때 드린 온라인 예배는 예배가 아니었나? 그렇게 반문합니다. 예배가 맞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이고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는 것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신앙의 핍박이 찾아왔을 때, 저들은 카타콤이라는 지하무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해골바가지(?)를 옆에 쌓아 두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를 포기한 채로 예배했을 것입니다. 귀한 예배의 모습입니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맞닿은 곳에 있는 북한 노동자들 가운데는 제주도 극동 방송국에서 쏘아 올리는 단파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려운 노동의 현실 속에서도 예수를 영접하고 십일조를 천 조각을 꿰멘 이불속에 집어넣어 그 방송국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들이 제주도 애월읍에 있는 극동방송국 지하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북한에 예수 믿는 이들 가운데는 밤이 되면 산에 올라가 땅을 파고 숨겨둔 선대의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내어 둘러앉아 소리죽이며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교회라는 장소도, 예배의 형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의 참 예배입니다. 교회가 없지만, 생명 건 이들의 예배에 큰 은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예배의 행태는 제한적인 조건에서 드려지는 한계가 있는 예배입니다. 밝은 광명의 세상에서 마음껏 주의 전에서 드릴 그 예배를 바라보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지금 광명한 세계를 살아가고 교회가 문을 열고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골방 예배만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영적 게으름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성경은 게으름은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악하고 게으른 결과는 그저 주님의 엄한 책망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 돈 문제와 신앙
개인주의, 편리주의와 더불어 우리의 신앙을 장애하는 것이 물질주의입니다. 돈 문제입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 때, 시험 든 성도가 외치는 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별히 돈의 문제를 외칩니다. 은혜 떨어진 교회에서 생긴 일인데,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을 소개해 봅니다.
‘내가 피땀 흘려 번 것을 가지고 교회에 가져다주었더니, 목사가 혼자 톡 털어 넣어서 자기 입에 다 집어넣었다.’ 인생의 연약함을 전제하지만, 물질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가난한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평균적인 신앙은 좋은데, 물질의 문제에 항상 넘어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결국 물질의 문제도 신앙의 문제의 연장이기에, 그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새롭게 되어져야 합니다.
물질의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자신을 드려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물질 부분에서 하나님 앞에 회복이 되어지면 더 놀랍게 쓰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질서의 회복이며, 더 나아가 영적인 질서가 회복되면, 물질 문제의 악순환도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마음과 정성만 있으면 되지, 굳이 몸이 갈 필요가 있느냐고 핑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복된 신앙생활은 기준이 분명합니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내 몸을 가지고 가서 예배드린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의 신앙 좋으신 분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배생활, 교회생활이 분명한 분들이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주의 전을 향해 나아와 예배 드렸던 분들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성도의 신앙의 정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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