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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3월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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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보다 앞서는 것

기영렬 목사
달라스 드림교회 담임

신앙생활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 하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예배는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할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보면, 예배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먼저 우선되어야 할 한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형제와 화목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예배는 참으로 소중하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헌신입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과 불화하면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뻐 받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갑니다. 먼길이라도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 고향을 찾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일 형제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다툰다면 부모님의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교회에 모였지만, 반목하고 질투하고 서로 분노를 품은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리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선인만이 아니라 악인도 사랑하시는 분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햋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마 5:44–45). 하나님은 악인의 악행을 미워하시지만, 그렇다고 그 영혼 자체를 완전히 내팽개치지는 않으십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가인을 보호하시고 누구도 그를 함부로 해치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그의 죄를 두둔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을 보면, 하나님이 악인을 당장 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어떻게 이 불가능에 가까운 길을 가능케 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는 순간 가능해집니다.
앤드루 매코널이 쓴 「잘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가치와 평가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한 아버지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시계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먼저 보석상에 가서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라고 시킵니다. 보석상에서는 “오래된 모델이라 100달러밖에 안 된다”고 평가하고, 전당포에선 고작 20달러를 제안합니다. 그러나 박물관에 가 보니 이 시계가 귀한 골동품이라며 25만 달러를 주고 사겠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람마다 너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 다르니, 네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에게 네 인생과 시간을 투자하라”고 조언합니다.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근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인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롬 5:8). 내가 과연 얼마나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는지, 나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는다면 우리는 원수마저도 사랑할 힘이 생깁니다. 비록 다른 사람이 나를 아무리 잘못 평가하고 가치를 폄훼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초연할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죄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내가 비판하고 있는 그 사람마저 사랑하고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긍휼한 마음을 품을수 있습니다.
현대 미디어는 분노와 혐오를 부추기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 이득을 얻으려 합니다. 누군가를 저주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가 ‘정의’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판을 넘어 적대감에 물든다면, 어느새 사람들은 증오와 분노에 기울고 맙니다.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저주는 결국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것입니다.
또한 가지 화목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마음의 태도 중 하나는 편견입니다. 아인슈타인이 강의 시간에 구구단의 9단을 칠판에 써내려갔습니다. 그런데 9×10을 ‘91’로 적자 학생들은 그가 큰 실수를 했다며 비웃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여러분들은 아홉 문제를 맞힌 것은 칭찬하지 않고, 단 한 번의 실수를 크게 부풀려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시각의 문제입니다”라고 일침을 놓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원죄로 인한 타락후에 긍정보다는 부정에 훨씬 더 잘 반응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과 화목하게 사는 비결은 단점을 덮어주는 넉넉한 마음, 그리고 장점을 발견해 주는 긍정적 시선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얻어지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이는 넘을수 있는 장애물이 됩니다.
예배는 우리 신앙에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무시되고 관계가 깨진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 앞에 진정한 헌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인까지도 사랑하시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면, 우리 또한 옳지 못한 상대를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예배자로 서기 위해서는,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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