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노비즘이란 (Snobbism)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대상의 알맹이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남에게 과시하거나 돋보이기 위해 껍데기만 빌려오는 성향 및 허영을 나타내는 문화사회학 용어입니다. 지적 허용이라는 말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한국인들이 잘 아는 영화배우 장근석이 그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아래서 한가로이 누워 있노라면, 더불어 앙드레 가뇽의 연주까지 함께라면 더 이상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 글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앙드레 가뇽이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음악에 특별한 조예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보통 사람들은 앙드레 가뇽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그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입니다. 뉴에이지 음악 피아니스트로 꽤 유명한 사람입니다.
네트진들은 이런 표현이 불편했는지 그를 ‘허세근석’ 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비판하며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음악에 조예가 깊고, 시적이며, 문학적인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힘이 있어 보이고 싶어 하고 건강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도 되지 않는 사람이 분에 넘치게 비싼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고, 럭셔리 차를 타고 비싼 집을 소유하는 일도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성공을 바라고 그들이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얻기 원하지만, 어떤 부모는 내 자녀의 성공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 자녀의 성공을 바라는 부모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의 문제는 이런 허세근성이 많이 표현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소셜 미디어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우월감 내지 열등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갖기도 합니다.
스노비즘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6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내놓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 지도자에 해당하는 바나바도 앞장섰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동참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헌신의 동기가 스노비즘 때문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는데 나라고 빠질 수 있나 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막상 밭을 팔고 난 후 돈이 아까 왔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판돈의 일부를 드리고도 모두 드렸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밭을 팔고 일부를 드린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밭을 판돈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나는 이렇게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왕인 사울도 허세근성으로 가득한 왕이었습니다. 왕으로 선택될 때 그는 겸손했습니다.
자신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왕으로 뽑히는 순간에는 부끄러워 숨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왕이 된 얼마 후부터 그는 끊임없이 백성의 인정을 갈구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왕이 백성들의 인정을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면서까지 자신의 허영심리를 채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무시하고 좋은 것은 남겨서 하나님께 제사하자는 백성의 요구는 받아들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더 이상 왕이 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듣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면 보통 사람 같으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체면을 챙깁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소문이 날까봐 노심초사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자신과 함께 가서 제사를 지내자고 제안합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나는 아직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과 친하다고 과시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무엘 상 15장 30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삼상 15:30, 개역개정)
사무엘로 하여금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사울을 높여서 자기 체면을 세워달라는 요구입니다. 사울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영적지도자나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체면 때문에 위신때문에 봉사하고 사역하는 모습입니다.
영적인 스노비즘입니다. 영적인 스노비즘의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을 의식함보다 사람을 의식하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우상숭배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 행위, 십일조나, 하루 세 번의 기도, 금식의 문제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을 자신들의 명예나 위치를 높이는 일에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명예를 추구한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외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이 부족해도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를 가장하고 포장하는 일에 고통 않아도 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