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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4월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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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문 목사] 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믿음은 무엇일까?

안광문 목사(생명샘교회)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세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는 영적으로 큰 문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두아디라는 상업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염색뿐만 아니라 가죽, 의복, 제빵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각각 직종마다 길드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도넛 협회, 세탁소 협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 중에 많은 분들은 이러한 길드에 가입한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길드에 가입하는 게 뭐가 문제일까요? 길드는 우리의 도넛 협회나 세탁소 협회와 다르게 길드마다 수호신들이 있어서 회원들은 자기가 가입한 길드의 신을 섬겨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그 당시 제의는 부도덕한 파티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수호신에게 드리는 제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도덕한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침목이라는 명목 아래 우상 숭배를 하고 행음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드에 가입한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도 역시 이런 제의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제사 의식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길드에서 강제로 탈퇴 당하거나 아니면 불이익을 당해야 할 각오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적당하게 우상을 숭배하고 타협하게 되면 안정된 삶, 편한 삶을 살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옳은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복잡한 계산과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결국 최종적인 선택은 현실의 이익을 위해, 작은 도시에서 보다 안정된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기보다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세상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바로 앞 버가모 교회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반해 이 두 교회는 처음 사랑은 지켰지만 문제는 그러다 현실과 타협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단과 타협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말았습니다.
잘 보면,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로마 황제 숭배라고 하는 정치적인 박해가 있었다는 점에 반해 두아디라 교회에는 정치적 박해뿐만 아니라 종교적 박해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핍박은 없었지만, 교회 안에서 그릇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이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는 박해를 통해 우상 숭배를 하게 하는 전략을 세웠던 반면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는 핍박보다는 거짓 교훈을 통해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길드를 탈퇴하자니 먹고 살길이 없고, 먹고 살기 위해서 길드에 남아 있자니 우상숭배를 할 수밖에 없었던 딜레마에 놓인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에게 바로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가 그럴듯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럴싸한 말로서 우상숭배를 합리화해 주고 죄 가운데 머물게 했던 것입니다.
보통은 어느 시대, 나라, 지역에서나 복음이 처음 전파되기 시작할 때 사탄이 사용하는 방법은 세속 권력들을 통한 극심한 박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어떤가요? 정치적 박해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탄의 공격이 끝난 걸까요? 아닙니다. 사탄의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는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사업상, 직업상 여러 이유로 신앙을 등한시하게 하고 우상숭배를 비롯한 죄악 가운데 있을 수밖에, 죄악 가운데 참여할 수밖에 없게 하고, 그런 죄악을 교묘하게 합리화시켜 주어서 계속해서 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도록 만드는 전략입니다.
핍박이 올 때는 잔뜩 긴장하면서 준비할 수 있지만,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공인 이전의 성도들 신앙이 굳건했던 데 비해 기독교 공인 이후 오히려 기독교가 급격하게 타락하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근시안적 시각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눈앞의 현실에 촉각을 세우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 영혼 이런 것보다는 현재의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현재라는 좁은 공간, 짧은 시간 속에서 갇혀 살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며 사는 것, 즉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 11:1). 믿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비록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게 존재한다는 증거, 그 증거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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