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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5월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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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문 목사] 하나님의 생각 vs. 나의 생각

그 너머를 바라보시는 분을 바라보아야…

안광문 목사
생명샘교회 담임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삭의 아들이자 아브라함 손자입니다. 야곱에게는 부인이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 이 두 사람은 자매였습니다. 야곱은 원래 동생 라헬을 좋아해서 라헬과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라반이 첫날 밤에 신부를 바꿔 치기를 하는 바람에 야곱은 레아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항의를 하였고, 그러자 라반은 라헬과도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야곱은 두 명의 부인과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만 좋아했고, 라헬이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사람들도 라헬이라는 이름을 많이 씁니다. Rachel은 라헬에서 온 이름입니다. 이에 반해서 레아라는 이름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Leah는 레아에서 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 사람들도 성공한 인물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David, Joseph, Daniel도 유난히 많습니다. David는 왕, Joseph과 Daniel은 총리까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는 아마 자신의 아이들이 잘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요?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다만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집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일 것입니다.

레아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자기 의사와는 아무 관계 없이 아버지에게 떠밀려서 억지로 남의 신혼방에 들어가면서 결혼했습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동생 부부에게 민폐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단 결혼을 했으니 남편에게 사랑받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오죽하면 첫아들을 낳고 “주님께서 나의 고통을 살피시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이제는 남편도 나를 사랑하겠지” (창 29:32) 둘째 아들을 낳고 “주님께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렇게 또 아들을 주셨구나” (창 29:33)라고 말합니다. 셋째 아들을 낳고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 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 (창 29:34) 레위라고 이름 짓습니다. 넷째 아들을 낳고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 (창 29:35) 이름을 유다라고 짓습니다. 레아의 시선을 잘 보십시오.

첫째부터 셋째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레아의 시선은 절대적으로 남편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가져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라이벌 라헬을 이기고 남편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을까?” 정말 절실합니다. 그렇지만 레아가 넷째 아들을 낳고서 이번에는 이름을 뭐라고 지었는지 보세요.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 (창 29:35)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 이름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 (창 29:35) 주님이라는 말이 나오고 찬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동안 절대적으로 남편에게만 꽂혀 있던 레아의 시선이 이제 하나님께로 옮겨집니다. 이 아이가 바로 유다입니다. 유다 지파의 그 유다. 유다 지파를 통해 다윗이 태어났고,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레아가 알았을까요? “아, 이 아이를 통해 위대한 다윗 왕과 온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도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 (창 29:35)라고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레아는 “어떻게 하면 라이벌인 라헬을 이기고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을까? 이 생각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님께서는,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열어 주셨다.” (창 29:31)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레아는 간절함으로 자기가 움켜쥐고서 “어떡하든 내 힘으로 해야 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되겠지, 다음번에 되겠지.” 그러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레아가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니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 (창 29:35)는 고백이 나옵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라헬만 사랑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바뀐 것이 하나 있습니다. 레아의 시선입니다. 그동안 남편에게만 집중했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만 뜨면 생각하고, 그래서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그것이 Business일 수 있고,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아이들 문제일 수 있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너머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 너머를 바라보시는 분을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 눈앞에 닥친 상황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한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시선은 그 너머에 있으십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사 55:8) 이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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