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슬리교회 담임
이스마일 카다레는 알바니아 출신의 작가로 소설 『부서진 사월』(Broken April)을 썼습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알바니아의 관습법 ‘카눈’을 소재로 피의 복수라는 임무를 운명적으로 부여받은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알바니아는 “피로써 피를 갚는다”는 카눈에 따라 피의 복수가 끊이지 않습니다. 많은 알바니아 남성들이 이 관습법에 따라 매년 희생되고 있으며, 피의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집 밖에 나가질 못한 채 숨어서 지내고 있습니다. 피는 또 다른 피를 불러올 뿐입니다. 복수라는 악의 게임은 계속 주고 받고를 반복하다 모두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입니다. 이 잔인한 게임에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5:21~22)고 말씀했습니다. 실제 저지르는 살인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살인으로 이끄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라가’라고 욕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말 한 것이 모두 살인과 관련된다고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마음의 분노가 살인의 출발점인 동시에 이미 마음의 살인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 살인은 형제 사이 분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기에,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고 죄에 굴복하여 동생을 죽였습니다.
가인이 가졌던 이 분노의 밑바탕을 들여다보길 바랍니다. 거기엔 자기 자신을 왕처럼 생각하는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분노를 내는 순간만큼 자기 자신이 곧 왕이요 법이요 심지어 하나님이 됩니다. 자기가 기준입니다. 자기 기준에 맞지 않고, 자기 성에 차질 않아 다른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는 이 교만이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내 눈이 기준, 내 말이 곧 법, 내가 하나님” 이렇게 말한다면 창조의 의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분노가 마음 바깥으로 표출될 때 가장 먼저 다른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모독과 멸시로 나타납니다. 형제에게 ‘라가’라고 합니다. 바보, 천치, 돌대가리라는 욕설이지요.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멸시란 다른 사람을 고의로 깍아 내리는 마음과 행동입니다. 인격체로서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대접하지 않습니다. 멸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인격적 살인이요 다른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는 악행입니다.
내가 화가 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멸시하거나 모독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게 우리의 표정과 말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를 두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가장 단순한 진실 하나는 말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The simple moral fact is that words kill)라고 번역했습니다. 형제를 향하여 욕하고 미련하다고 무시하는 것 또한 살인이라는 말씀이죠. 우리가 하루에도 얼마나 자주 부지 중에 이런 살인죄를 범하고 있는지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심각한 죄인 줄도 모른 채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랑하고, 또는 미워하는 대상이 멀리 있는 누군가가 아닙니다. 늘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사람들은 늘 우리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분노하고, 멸시하고,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당하는 피해자는 우리 가족과 이웃, 직장 동료, 같은 교회 교인들입니다. 우리가 죽임의 문화를 극복하고 살림의 문화를 만들어 갈 자리 역시 먼 곳에 있지 앟습니다. 아마존 원시림과 같이 생태계 파괴의 현장이나 아프리카, 아시아의 기아와 질병의 땅만이 살려야 할 곳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늘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이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에, 우리 삶의 자리, 우리 가정과 일터, 우리 교회가 살림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살림의 문화를 일구기 위해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살피고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분노와 멸시, 인격적 모독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는 언어입니다. 잠언18:21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말로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쉽게 화를 내어 비방하거나, “누구를 닮아서 그러냐? 미련한 놈”이라는 경멸하는 말은 마땅하지 앟습니다. 회사나 교회에서 의견이 나뉘고 대립할 때, 누군가를 향해 분노와 미움이 솟아날 때, 다른 사람이 나를 험담하고 욕하고 비방하는 소리를 듣고 억울할 때면,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