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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5월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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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민 목사] 배경과 더불어 읽는 성경(4)

기드온과 삼백 명의 모질이

최승민 목사
현 플라워마운드 한인교회 장년교육 담당 목사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입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정보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겪어 온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선이해(pre-understanding)’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선이해는 양날의 칼 같아서 때로는 올바른 성경 읽기를 방해합니다.

익숙한 성경 본문을 대할 때, 넘겨짚어 가며 읽는 방법은 성경 이야기(narrative)에 대한 친숙함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가 실제로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쓰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 이야기에 대한 기존의 이해가 잘못되었을 때, 익숙함에 젖어 그저 넘겨짚어 가며 성경을 읽는다면, 그 안에 담긴 하나님 뜻의 풍성함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가 굳어져 하나의 진실처럼 되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동방 박사가 몇 명인가에 대해 의심 없이 세 명이라고 생각하는 것,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들에 핀 백합화’라는 표현에서 ‘백합’의 ‘백’을 한자의 ‘흰 백(白)’으로 여겨 흰 꽃을 떠올린다든지, 백합과의 대표적인 꽃 백합(百合, lily)과 연결 짓는 것 등이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몇 명이었는지, 들에 핀 백합화가 정확히 어떤 꽃인지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이야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오해의 결은 조금 다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만큼 오해의 깊이가 깊습니다.

기드온과 관련된 일화들 하나하나가 매우 재미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 소명의 확실함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기적 이야기는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기드온 이야기의 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기드온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삼백 명의 용사들과 더불어서 미디안 족속을 이스라엘로부터 쫓아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삼백 명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기드온과 삼백 용사’라는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과연 그들이 용사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과 싸우기 위해 모였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수가 너무 많아서 미디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나가 싸워 미디안 족속을 이긴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승리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가 많은 이스라엘 군대에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기드온에게 많은 사람을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차례 ‘두려워 떠는 자’들을 돌려보내고, 만 명이 남았습니다(7:3).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만 명도 많다고 하시며 물가로 내려가 시험을 통하여 소수의 사람만 뽑으라고 하십니다.

최종적으로 뽑힌 소수의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만 명 중에서도 뽑힌 삼백 명이라는 소수의 인원이니 ‘소수 정예(精銳)’일 거라고 자연스레 넘겨짚어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의 원리를 따라 일하셨다면 정예의 삼백 명을 뽑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 정예의 군대가 나가 싸워 승리한다면, 하나님이 도우셔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한 사람이 천 명의 역할을 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병사들이기에 승리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가 많아서 미디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고 하신 의도와 맞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예가 아니라 가장 못난 모질이 삼백 명을 고르고 고르십니다.

그 삼백 명이 어떤 삼백 명입니까? 물가로 내려가서 물을 마시는 자세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이었습니다. 어디서 적이 쳐들어올지 살피며 언제든 전투 준비의 자세가 된 정예군이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이해는 맥락상 맞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고대 서아시아(Ancient West Asia) 지역 문화 속에서 용사의 이미지는 모름지기 물가에서 물을 마실 때 얼굴을 물에 담그고 먹는 상남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물을 손으로 떠서 주위를 살피며 혀로 핥아 가며 먹는 남자들의 모습은 전투에 나갈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그야말로 나약한 모습 자체이지요. 삼백 명은 이스라엘 남자 중에 가장 나약한 사람들 이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들어 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잘난 자, 흠 없는 자, 신수가 훤한 자, 믿을 만한 듬직한 사람이 아니라, 모질이라고 부를 만한 형편 없는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을 통해 위대한 구원을 이루시는 일을 하십니다. 기드온도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었습니다(삿 6:15). 기드온 이야기는 믿음 좋은 기드온과 잘 준비된 엘리트 삼백 명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하나의 영웅담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기드온과 그보다 더 보잘것없는 삼백 명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질이처럼 보이는 나약한 삼백 명과 함께 일하신 이유는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약함을 강함으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내 삶의 약한 부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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