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잘 아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이 존 뉴턴 입니다. 그가 늙어서 치매에 걸렸습니다. 평생을 지적으로 품성을 가지고 지성인 답게 살아 왔었는데 늙어서는 자기이름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의사가 치매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래도 생각나는 이름이 있으면 한번 이야기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뉴턴이 머뭇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Jesus Christ, My Savior”,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입니다. 훗날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을 잊어 버려도 영원히 우리가 기억하고 불러야 할 이름이 바로 “예수 나의 구주” 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일찌이 초대교회는 이 말씀 위에 세워졌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영적인 가족 공동체를 이룬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이 절대 줄 수 없는 것, 바로 ‘생명’을 주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힘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가지지 못하는 ‘구원’의 힘이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결국 생명과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겁니다. 결국 구원과 생명이 예수의 이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올해도 우리는 어김없이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 마음에 와 닫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섬기셨는데,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죄송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니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이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의 신앙 모습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갖고 있지 않는 모습입니다. 섬김도 없고, 사랑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열매들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언제부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긍휼이 우리 삶의 현장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과 자존심을 위해서 교회를 다니고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하나님까지도 이용하려 하는 모습입니다. 더 이상 직분에서도 섬김이나 사랑, 긍휼은 찾아 보기가 힘듭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고, 무엇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기 전에 그의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의 이름은 유대 이름의 뜻으로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대로 크게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명문 집 안에서, 많은 학식을 가지고, 사회적 지위도 가지고,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 인정을 받고,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군림하며 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의 이름 안에 믿음이 있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소망이 있고, 예수님의 인격 안에 사랑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 소망 사랑 앞에서 순간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뽐내고,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학벌과 집안과 재산을 앞세우고,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교만한 모습,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주님 앞에서 자신이 과거에 내 세웠던 것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배설물 같은 것으로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유대 이름으로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소망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다보니 “당신 이름이 뭡니까?”하고 물어보면 “네~ 제 이름은 바울입니다. 작은 자 입니다”로 바뀌더라는 겁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도저히 자신의 이름을 내 세울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큰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작아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자신 안에서 드러날 때 비로소 큰 자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의 삶에 있으면 우리가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다음 주면 올 해도 변함없이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작년에도 있었고, 아마 내년에도 찾아올 겁니다. 분명한 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바라기는 우리들의 마음에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억하며, 진정 지금까지 죄의 본능으로 살아 온 우리들의 모습을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어찌하면 좋습니까?” 참회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의 삶을,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성탄절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렇게 거룩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해 보는 성탄의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