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이겨내고 한층 성숙하게 된 우리의 믿음

베드로전서 1:7에서 베드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믿음을 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금은 자연 상태에서는 금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금광에서 금광석을 채굴하면 용광로에다 돌을 태워 금만 뽑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광석에서 돌과 금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5:5, 돌 반, 금 반은 아닐 것이고, 9:1, 돌 90%, 금이 10%, 이것도 금의 비율이 높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99:1, 돌 99%, 금 1% 정도 될까요?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까 금광석 1톤에 금은 겨우 몇 그램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금이 아니라 그냥 돌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1톤 중에서 금은 1-5g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1톤은 1,000,000그램이니까 1톤짜리 금광석에서 금이 1그램 나온다면 금의 비율은 1/1,000,000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 믿음도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괜찮은 줄 알았는데, 믿음이 많은 줄 알았는데, 겨우 그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 알 수 있을까요? 우리 앞에 시련과 어려움이 다가왔을 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시련과 어려움은 1톤의 금광석 중에 1그램 금을 찾아내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과 돌이 섞여 있는 것 같은 믿음을 순수한 금으로 만드는 과정, 깨끗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성숙한 믿음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게 시련이고 어려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련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시련을 만나면 패닉 상태가 됩니다. 낙담하고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그 순간은 우리 신앙과 믿음에 장애가 있는 것처럼 하나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원리대로, 우리가 열심히 읽었던 성경과 아무 관계 없는 것처럼 반응하게 됩니다, 컴퓨터로 하면 마치 바이러스에 걸린 것처럼, 버퍼링이 일어나는 것처럼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실제가 따로 돌아갑니다. 시련을 통해서 정제된 순수한 신앙을 가지게 되고 시련을 지나면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정작 실제에서는 이 원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프로 야구 투수들이 던지는 공은 시속 100마일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속도입니다. 타자들이 이런 공을 마주하게 되면 이 공을 치기는커녕 그 속도에 눌려 공포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공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이론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공이 얼마만큼 다가 왔을 때, 칠지 말지 결정해야 하고, 거기서 얼마만큼 더 다가 왔을 때 방망이가 나가야 하고, 공은 45도 각도로 쳐야 한다는 등의 지식을 숙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실제 상황에서는 이론만 숙지한다고 해서 그렇게 빠른 공을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사실 타자들은 본능적으로 쳐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루에도 수백 개씩 그런 공을 대하고 쳐보는 수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반복해서 겪어보고 연습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이론이 실제가 될 때까지 말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웃시야 왕은 16살에 남왕국 유다 왕이 됐고, 하나님의 향한 믿음과 열심이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웃시야 왕을 형통케 하셨습니다.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군사면 군사 모든 면에서 아주 잘 나가는 왕이 되었고, 남왕국 유다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대의 왕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웃시야 왕이 손대는 것마다 승승장구를 했습니다. 실패나 시련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제사장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율법을 어기고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분향하겠다고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병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처음부터 이렇게 안하무인에 독불장군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웃시야 왕을 이렇게 교만하고 안하무인으로 만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련이라는 고통, 어려움의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요즘 국제 금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금을 좀 사둘 것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 사기를 잘한 거 같습니다. 저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데, 뭐든지 제가 사기만 하면 떨어지고, 제가 안 사면 올라가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습니다. 뭘 사시고 싶으시면 저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안 샀으면 사시면 됩니다. 제 믿음이 1톤까지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그 중에 한 0.01%, 1/100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 백만분의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나마 1/1,000,000도 시련이라고 하는 어려움을 거치지 않으면 그것은 금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이 어떻다 해도 시련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피할 수가 없다면 지나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시련의 그 시간과 그 여정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서도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간은 주님을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고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금보다 더 귀한 것은 뭘까요? 시련을 이겨내고 한층 성숙하게 된 우리 믿음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