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의 여정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훌륭한 모습을 보여야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거래적 관계로 신앙을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완벽한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흠 많고 부족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빚어가시는 은혜의 드라마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자, 한 민족의 이름이 된 위대한 인물 야곱의 삶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의 이름 ‘야곱’은 본래 ‘발뒤꿈치를 잡다’는 뜻으로, ‘속이는 자’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름처럼 그의 젊은 시절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임수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사냥에서 돌아와 굶주린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가로챘고(창 25장), 임종을 앞둔 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이 받아야 할 축복 기도를 가로챘습니다(창 27장). 어머니 리브가의 계획에 동참하면서도 그는 “들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며 자신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고, 염소 가죽을 팔에 붙여 아버지를 기만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리기보다, 늘 자신의 꾀와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 했습니다. 늘 하나님보다 한발 앞서 달려가던 교만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대원칙인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는 말씀은 그의 삶을 관통했습니다. 속이는 자였던 야곱은 자신의 인생 중반부에서 철저히 ‘속는 자’의 고통을 겪으며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을 일했지만,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 원치 않던 레아를 먼저 아내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후 20년간 라반의 집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품삯을 열 번이나 속이는 부당한 대우를 견뎌야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아버지를 속일 때 사용했던 ‘염소’는 훗날 그가 속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아들들은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요셉의 옷에 묻혀, 그가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야곱은 20년이 넘는 세월을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순한 인과응보나 불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교만과 이기심, 모난 인격을 깎아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굳게 믿었던 야곱이 그 방법의 한계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빚으시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야곱 인생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은 얍복강가에서 찾아옵니다. 20년 만에 형 에서를 만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홀로 밤을 지새우던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날이 새도록 씨름합니다. 이 씨름은 그의 인생을 건 절박한 기도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환도뼈가 부러집니다. 그의 힘과 꾀, 세상적인 방법의 상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된 후에야, 그는 “내 이름은 야곱(속이는 자)입니다”라고 자신의 부끄러운 실체를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혹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하나님의 왕자)’는 의미를 지닌 이 이름은, 그의 삶이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하려는 ‘야곱’의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는 때로 고통스러운 결과를 맞이하며 얍복강의 밤과 같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의 갈등, 직장에서의 어려움, 뜻대로 되지 않는 자녀 문제 등,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야곱처럼 하나님을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내 계획과 방법이 부서지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더 나아가 야곱의 이야기는 더 크고 완전한 은혜를 가리킵니다. 야곱은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두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연단 받았지만, 그가 경험한 ‘심고 거두는 법칙’이 우리 모두에게 예외 없이 적용된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심었기에, 그 열매는 영원한 심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의 위대한 신비가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뿌린 죄의 씨앗을 대신 거두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무 죄도 심지 않으신 그분께서 우리가 마땅히 거두어야 할 저주와 심판의 광풍을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죄를 심은 우리가 도리어 용서와 구원이라는 은혜의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속이는 자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듯,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연단 속에 있습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연단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존재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절망의 얍복강가에서 절름거리며 주님을 붙들 때, 주님은 우리의 옛 이름을 지우시고 은혜의 새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시며 회복의 아침을 맞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