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과 함께 무르익어가는 감나무에 시선이 머문다. 감나무에 주홍빛 감이 매달려 있으면 새들이 날아와 잠시 쉬어간다. 감을 수확할 때 우듬지에 몇 개 남겨놓는 것도 하늘길을 나는 조류들을 위한 작은 배려일 테다.
가을이 되면 지인들에게 홍시를 나눠줄 생각에 필자의 마음은 이미 홍시 빛으로 물든다.
가을은 어느 계절보다 제철 과일이 풍성하다. 마트에서 연시와 마주하는 순간, 폭풍을 견디고 열매를 맺기까지의 시간을 유추해 본다.
마트에서 구한 연시의 크기와 상태를 분류해 용기에 담는다. 용기를 밀봉하고 시간이 경과되면 잘 숙성되고 있는지 매일 들여다본다. 연시를 발효시킬 때 중요한 것은 연시와 사과의 비율이다. 연시가 숙성될 때 사과의 품종에 따라 홍시의 맛과 효능이 다르다. 연시와 사과 품종을 잘 선택해야 한다. 연시를 어떤 용기에 담느냐의 미묘한 차이가 홍시 맛을 좌우한다. 결국, 홍시 맛은 주인의 사랑과 정성의 양에 비례한다.
연시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색상이 달라진다. 단단했던 몸이 투명한 빛을 머금기 시작하면 빛깔의 변화에 따라 숙성의 완성 여부를 가늠한다. 잘 숙성된 홍시는 하루 이틀만 지나도 제맛을 잃을 수 있다. 실내 온도와 발효 조건이 잘 조성되지 않으면 최상의 맛이 나지 않는다. 최적의 발효 상태에서 가장 적절한 때에 홍시 맛을 음미하는 게 중요하다.
연시가 발효되는 과정을 마주하며 오버랩되는 이야기가 있었다.
필자가 지인에게 홍시를 선물했을 때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선교사인 지인 오빠는 과일 중에 홍시를 제일 좋아한단다. 지인 어머니가 가을만 되면 선교사인 아들 생각에 감을 따서 홍시를 만든단다.
해외에 홍시를 보낼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던 어느 날, 지인 어머니는 딱딱한 연시를 선교지에 보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선교지에 배송된 연시는 배송기간 동안 홍시가 되었다.
지인 오빠는 그 홍시 아닌 홍시를 먹으며 눈물을 흘렸단다. 이야기를 전하는 지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선교지에서 받아본 연시는 물컹하고 빛바랜 홍시가 되어 상자 안에 있었을 거였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홍시를 입에 넣었을 지인 오빠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가을에 어떤 과일이 홍시처럼 깊고 달콤한 맛으로 사람의 미각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홍시의 부드럽고 빨간 과즙이 입안에 닿는 순간 세로토닌 호르몬이 분비되어 세포 구석구석까지 전달된다.
미각 세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홍시의 과육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여정을 떠날 때 얼마나 행복한가.
단단했던 연시가 부드럽고 유연한 홍시로 된 비결이 무엇일까. 딱딱한 연시가 부드러운 홍시가 되기까지 어두운 공간에서 발효되는 시간이 있었다. 연시가 사과의 효소를 흡수해 홍시로 되는 과정이 신비로웠다.
자신과 다른 이물질에서 배출되는 성분으로 과육 자체가 질적으로 변했다. 사과의 레티놀 성분과 결합해 단단했던 연시가 부드러운 홍시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연시와 홍시 사이에 사과가 있었다. 사과는 공기가 차단된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자신의 효소로 연시를 발효시키는 희생을 감수했다. 영양과 효소가 없는 상태로는 더 이상 사과의 구실을 할 수 없다.
자신의 맛과 효능을 상실하면서 다른 과일에 양보하고 자신을 덜어내는 사과의 놀라운 역할이 있었다. 사과의 맛과 형태, 빛깔이 변해서 사과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기꺼이 사과는 연시와 홍시 사이에 중재자가 되었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연시는 깊은 단맛을 품고 홍시로 재탄생했지만, 사과는 어떤가. 사과는 연시와 홍시 사이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담고 있었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성향과 생각을 품고 어우러져 살아간다.
누군가는 양보하고 내려놓아야 타인과 공동체가 안정된 마음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연시같이 딱딱한 사람만 있다면 강퍅한 세상일 수밖에 없으리라. 연시가 홍시로 거듭난 것은 사과가 숨은 곳에서 그 몫을 감당했기에 가능했다. 사과의 역할을 간과하고 홍시 맛을 논할 수 없다.
어두운 용기에서 단단한 연시가 부드러운 홍시가 되기까지 고군분투했을 사과의 몫을 가늠해 본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자신의 수고로 소속된 그룹이나 공동체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얼마나 감사한가. 연시가 홍시가 되는 내밀한 시간 속에 삶의 깊은 지혜가 담겨 있다.
공동체에서 지나친 자기주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사람이 왕 노릇하고 주인 행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반응이다.
자신의 신앙적 소신과 가치 추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앞에 순종하는 게 우선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실까를 먼저 생각한다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공동체의 건강한 연합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양도하면 어떨까. 가정과 교회 공동체, 내가 속한 사회 공동체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