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8 F
Dallas
금요일, 9월 5, 2025
spot_img

[안광문 목사] 한결같은 은혜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신앙

안광문 목사(생명샘교회)

저는 룻기를 볼 때마다 의심하는 마음이 듭니다. “보아스는 100% 순수한 마음에서만 나오미와 룻을 도왔을까? 혹시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룻에 대한 흑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친절을 베풀었던 것은 아닌가? 늦은 나이에 젊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도와줬던 것은 아닐까?” 사실 보아스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보아스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반대로 100% 이런 의도를 가지고 룻에게 접근했다고만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설령 손해를 보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해도 그 마음만 있고 조금도 다른 마음은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비록 100%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실 보아스의 입장으로 돌아가보면 보아스가 룻의 고엘이 되어서 룻이 아들을 낳더라도 고엘 제도에 의하면 그 아이는 보아스 집안의 아들이 아니라 나오미 쪽,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룻기 4장을 보면, 그 아이는 보아스의 계보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마지못해 아니면 다른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돕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사실은 설령 그런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을 아시고 그 과정을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도까지 선하게 바꾸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한결같은 은혜 때문입니다.

룻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의 삶을 보면 한마디로 어렵고 고단한 삶, 되는 일이 전혀 없는 삶,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단한 삶, 되는 일이 전혀 없는 그런 삶 가운데 마치 우연처럼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미와 룻에게 있어서 룻기 1장을 한마디로 Worst였다고 한다면, 룻기 2장은 그래도 Better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야말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있나요? 아직도 1장에 머무르면서 먹고 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를 막막해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먹고 사는 문제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룻기 1장을 벗어날 수가 있을까?” 사실 이것만 관심의 대상입니다. 신앙의 측면으로 보더라도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 믿고 구원받게 할 수 있을까?” 그러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은혜로 룻기 2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제 먹고 사는 문제와 생존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이제는 룻기 1장은 완전히 벗어나게 됐습니다. 이제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 이제 살만하다. 아, 이제 됐다. 아, 이제 이렇게 살면 되겠다. 아, 이제 만족한다.” 그러나 여기에만 만족한다면, 여기에만 우리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룻기 3장과 4장에 기다리고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룻기 3장과 4장에도 이어지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10년 전인가요? 제가 룻기 설교를 이 요지로 했다가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룻기의 기록목적은 다윗 왕조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족보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보여 주기 위함이지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저도 룻기가 다윗 왕조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메시아 족보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룻기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고향을 떠나는 놀라운 결단을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바로 왔던 것이 아니라 하란이라는 곳에서만 10-15년을 머물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란이라는 곳도 살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차피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고, 하란이라는 곳은 살만했고, 가나안까지 가는 것보다 거기가 더 나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하신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해서 75세에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란에 만족하고 계속해 거기 머물러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놀라운 경험을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룻기 1장, 2장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됐어.”라고 만족하며 산다면 “신앙도 이만하면 됐어.”라고 만족하고 산다면 “구원받았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고 만족하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룻기 3장, 4장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한결같은 은혜를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달라스 생명샘 교회 안광문 목사 –

댓글 남기기

최근 기사

이메일 뉴스 구독

* indicates requi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