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람 데오란 라틴어로 Coram ‘앞에’ 라는 뜻과 Deo ‘하나님’이 합쳐서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이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칼빈이 자신의 일생을 지배했던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가 코람데오였다고 하여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슬로건이 되고 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인격을 판단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학교 성적보다 사람의 됨됨이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이유는 기업의 생산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상사에게 무례하고 동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많은 자기계발 서적들이 집중하고 있는 가치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야 하는지 행동해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 앞에서라는 선언은 마치 세상과 동떨어지고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코람데오는 부패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몰아치는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을수 있는 삶의 가치이다.
코람데오와 함께 코람 호미니부스: 사람앞에서, 코람 문: 세상 앞에서라는 말도 있다. 세상을 잘 살아가는 처세술이다. 그러나 코람데오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정신으로 사는 삶이다.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며 분별하며 사는 삶이다. 부패가 극에 달했던 16세기 중세 종교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코람문도, 코람 호미니부스가 아닌 코람 데오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람데오의 정신은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웠던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만)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 Sola Gratia(오직 은혜로만)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라는 다섯 가지 슬로건의 기초가 되었다.
성경에 코람데오의 삶을 살았던 인물가운데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다윗을 들 수 있다. 그는 왕이었다. 코람데오의 정신을 실천하기 어렵고 힘든 자리라 할 수 있지만 다윗은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사무엘하6장에 보면 이런 일이 있었다.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후 다윗은 70년동안이나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 있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 싶었다. 최첨단 수레를 만들고 성가대, 관현악단 수행원 모두 3만명이나 되는 사람을 데리고 법궤를 옮겨오는 일을 진행했다. 작은 책상 정도 크기에 불과한 법궤를 위해 다윗이 쏟은 정성은 동원된 인원만으로도 어느 정도인지 상상해 볼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수레에 실려 있던 법궤가 앞에서 메고 가던 소들이 갑자기 펄쩍 뜀으로 인해 거의 쓰러질뻔 한 것이다. 앞에 있던 웃사는 재빨리 가서 법궤가 넘어지지 않게 붙들었다. 순간 그에게 심장마비가 찾아왔는지 웃사는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성경은 하나님이 치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다윗은 크게 낙심한다. 성경은 화가 나기까지 했다고 기록한다. 이 일로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을 머물게 된다.
성에 돌아온 다윗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쓰러지는 법궤를 붙잡은 웃사를 죽이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마 후에야 다윗은 자신의 문제점을 알아냈다. 율법에서는 허락받은 레위인들이 수레가 아닌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멋있는 수레에 법궤를 이동하는 것이 훨씬 폼나고 멋있어 보인다. 준비하는 정성도 더 많이 들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코람 데오가 아니라 코람 호미니부스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율법에 정한대로 레위인을 통해 궤를 메고 다윗성으로 올라온다. 여섯 걸음을 걸을 때마다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도 드렸다. 얼마나 놀라운 헌신이었는지 가늠해 볼수 있다.
법궤가 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너무 기뻐서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목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본 부인 미갈은 다윗을 못 마땅해하면서 그를 책망했다. “어떻게 이스라엘 왕이 된 사람이 속살을 드러내면서 춤을 추느냐”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다윗이 당당하게 답했다. 여호와 앞에서 코람데오다. 그는 코람데오를 회복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개혁을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목회자들의 부도덕, 성도들의 방탕함, 거짓과 외식 모두 개혁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이 모든 문제들은 코람데오의 상실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배에 코람데오가 사라지면, 우상숭배가 된다. 봉사에 코람데오가 빠지면 자아실연이 된다. 전도와 선교에 코람데오가 빠지면, 숫자를 불리기 위한 이기주의가 되고, 이웃사랑에 코람데오가 빠지면 욕망이 된다.
코람데오, 2024년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이며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