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신체 기관 중에 제일 무거운 것이 무엇일까. 실제 중량을 계산하기보다 그 기능이나 역할에 있어서 순위를 결정한다면 1순위는 혀가 아닐까. 한치의 혀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위력이 있다.
오래전 미국에서 남편이 대학부를 맡아 사역할 때 겨울 수련회에 갔다. 그곳에서 세족식과 침묵 훈련, 그 외 여러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침묵 훈련’시간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각 조의 리더가 휴대전화기, 컴퓨터와 소지품 등 타인과 연결 가능한 모든 기기를 수거하고 사용을 금했다. 스물네 시간을 침묵하고 스물네 시간 후에 대화를 시작하도록 했다. 외향적이고 말하기 좋아하는 청년들은 한 시간도 참기 힘들어했다. 반면에, 묵묵히 그 시간을 침묵하며 자신의 할 일을 잘 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공동체 생활에서 침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분주한 현대인들의 삶은 침묵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침묵은 자기와의 싸움에 돌입하지 않으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잠시라도 손에서 휴대전화기를 떼면 심리적인 불안 증세를 보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인 관계에 무슨 문제라도 발생했는지 수시로 문자를 확인하고 아무 소식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현대인들은 질병에 걸린 듯하다.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자신을 위한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은 소중하다. 마음의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공해로부터 자신의 생각과 편견을 내려놓고 잠잠히 묵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다양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할 수 있는 내공이 쌓여야 진정한 침묵이다. 내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음성을 듣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요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는 누구나 침묵을 지킬 수 있지만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상황에 몰입하면 내 소리를 먼저 내고 아우성을 칠 수 있다. 풍파 속에서, 풍랑이 이는 파도 속에서, 모든 것을 삽시간에 삼킬 것 같은 화마 속에서 침묵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상황에 압도되어 아비규환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 안에서 풍랑을 마주했을 때 풍랑 자체를 바라보고 불안해했다.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께 어찌하여 풍랑이 이는데 돌아보지 않고 잠만 자냐고 반응을 보였다.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도 주님께서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주님께서 그 풍랑 가운데 계심을 믿었다면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리라. 제자들은 그 현상 자체에만 몰입했다. 현상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일하심을 잊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제자들을 압도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상황판단 능력을 상실했고 순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오로지 그 풍랑만 보였을 뿐이다. 배와 배 안에 갇힌 상황이 제자들을 삼켰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엄습한 두려움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의 실체가 표면화되었다. 제자들 바로 곁에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했다. 상황과 환경에 압도되어 그 일에 몰입하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 어쩌면 연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리라.
어떤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일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보다 내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갈 때가 있다. 3일 길 앞서 행하시며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은혜로 신실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한다면 내가 앞서서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터이다. 잠잠히 지성소에 들어가 그분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해야 하리라.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다수의 소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에, 소수의 소리가 침묵할 때 그 가치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다수가 지향하는 길이라고 모두 옳은 것이 아니고 소수라고 모두 그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소수의 소리가 더 옳을 때가 있다. 수나 질량의 문제가 아니라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성의 문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치와 방향인지를 먼저 분별할 필요가 있다. 맑은 날에는 알 수 없지만, 폭풍이 오고 소나기가 내리면 그 사람의 신앙의 실체가 드러난다. 입술로 범죄 하지 않고 잠잠히 침묵하며 모든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탁월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 거하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 어떨까. 백 마디의 말보다 잠잠히 침묵하며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많은 소리에 압도되어 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로 인해 소음 공해에 노출되어 있다. 내 목소리를 내기 전에 침묵하고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어떨까. 우리 일상이나 사역이 분주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일 때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아야 하리라. 주님과 친밀한 거리 확보를 유지하고 침묵하며 동행하는 삶은 어떨까. 폭풍 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업고 사막을 지나간 주님의 발자국만 흔적으로 새겨지길 갈망한다. 주님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내 발자국만 남는 삶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