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신앙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는 말을 꼽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는 고백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말 그리스도로 음역된 헬라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는 히브리어 ‘메시아흐(משחה)’의 번역입니다. 한 인간으로 사신 예수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자로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죄를 안고 죽으심으로써 인간의 죽음을 대신하셨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진리 그 자체입니다.
20세기의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종교는 신을 향한 인간의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오직 성경만이 신이 인간에게 내려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로서 인간이 어떠한 방법을 통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바르트의 표현으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Gott ist im Himmel und du auf Erden),” 즉 하나님은 인간 이해로 도달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라는 것이지요. 인간이 하나님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됩니다.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신 인생은 더 놀랍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사람들에게 멸시 받는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이방의 갈릴리(사 9:1)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주로 사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범위는 갈릴리 지역에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를 향한 반대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를 반대하는 만큼 그에 대한 조롱과 핍박도 적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으신 하나님이 가장 낮은 인간의 대우를 받으셨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받으신 조롱과 핍박은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십자가 형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인 고통 이전에 감정적인 두려움과 수치심이었을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붙잡히셔서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헤롯과 빌라도 앞을 전전하며 끌려다니는 것도 큰 수치였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 상에서 당하신 사건들은 인간으로서 어떠한 존엄도 남기지 않는 대우의 연속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명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 19:28-30)”
이 구절에서 언급하는 ‘해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해면은 스펀지와 같은 해면동물문에 속하는 동물을 총칭하는 명칭입니다. 모양은 스펀지와 유사합니다. 십자가 주변에 이러한 해면이 있었다는 것이 의아하지 않나요? 이 해면은 무엇을 위해 골고다, 십자가형이 이루어지는 곳에 위치해 있던 것일까요?
로마는 자신들이 지배하는 도시를 로마식 도시로 바꾸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로마식 도시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공중 화장실입니다. 해면은 로마식 공중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뒷처리용 물품, 오늘날로 말하자면 휴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대 시대에 이러한 해면을 오늘날 휴지를 사용하는 것처럼 일회용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로 씻어 여러 번을 사용했겠지요.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외침에 십자가 형을 집행하던 사람들은 아마 그의 갈증을 해소해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죄수가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탈수로 금새 죽지 않도록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그들이 택한 도구는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해면이었습니다. 부정한 죄수의 입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컵을 건네주기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해면을 택해 우슬초 줄기에 매어 예수님의 입술에 적셔줍니다.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해면으로 입을 적셔주는 대우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죽음이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이며, 그것을 이루는 성취의 행위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성경을 응하게 하려’ 이러한 대우를 감내하십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유월절 문설주에 피를 뿌리는데 사용하는 우슬초가 함께 사용됨으로 유월절에 재앙이 넘어갔듯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영원한 사망을 넘어가게 하는 역사를 일으킴을 암시해 준다는 것이지요(출 12:22 참조). 그렇기에 골고다의 해면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가장 수치스러운 대우인 동시에 구원의 역사를 암시하는 매개입니다. 오늘날 삶 가운데 해면을 입에 대는 것과 같은 견디기 힘든 일을 겪고 계신 분이 있나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문을 여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아픔과 상처, 눈물과 애환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보석으로 만들어가시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겨내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