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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월 24, 2024

[정우현 교수] 이혼이 답일까? (6)

정우현 교수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이혼이 과연 답일까? 라는 질문을 제목으로 지난 5회에 걸쳐 부부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을 말한다면 원래 이혼은 답이 아니다. 이혼을 목적으로 결혼하는 결혼이 있겠는가? 예수님은 이혼의 사유로 간음을 언급하셨다.

“누구든지 음행한 일도 없는데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아내로 간음하게 하는 자이며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하는 자이다.”(마5:32)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전에 “누구든지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다.”(마5:28)이라고 하신 말씀에 주목해보자. 그러니까 마음으로 성욕을 품는 것부터가 간음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누가 한 번 이상 마음으로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누구나 간음을 범하며 살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가 모두 이혼당해도 싼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요컨대, 너나 나나 우리가 모두 이혼당해도 할 말 없는 사람들로서 서로를 용서하고 사는 게 나중을 위해 좋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말씀에 이어 매우 중요한 행복 원리를 알려 주신다. 소위 ‘예스노’ 원리다.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말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5:37)

우리는 양심에 찔리면 ‘예스’할 것을 ‘노’하고 ‘노’할 것을 ‘예스’한다. 즉 ‘자기를 속인다’는 말이다. 팩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구차한 핑계다. 사실을 인정하면 수치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간음이 그렇다.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행음을 하면 수치심을 느낀다. 그때 느끼는 수치심은 얼마나 강렬한지, 행음한 사실을 마치 없던 일처럼 여기고 행동하려 더 많은 거짓을 꾸민다. 자기를 속여서라도 마음 깊은 수치심을 면하려는 자동적인 심리 작용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난 누구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사라진다. 그렇게 자기를 속이는 일이 반복될수록 본인에 대한 확신도 연기처럼 사라져간다. 자기 정체성의 분열이다. 쉽게 말해 멋진 조각상이 서서히 녹아 물처럼 되어 그 형상이 사라져가는 것과 같다. 이것이 사탄이 바라는 모습이다. 인생이 파괴되어 가고 자기 존재가 희미해질 때 사탄이 그 인생을 자기 밥으로 끌어당겨 삼킨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나가는 이성에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이고, 양심이 수치스러운 불법을 고발하면, 자동으로 자기를 속이고, 결국 악의 먹잇감이 되는 인생, 어떻게서바이브할 수 있나? 어떻게 행복을 회복할 수 있나?

예수님은 다음 말에 문제의 답을 명확히 언급하신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마5:44부분)

답은 사랑이다. 어떤 사랑인가?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이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보통 피해자는 원수 가해자에 대해 분노와 혐오와 복수심을 느낀다(매우 당연하다). ‘저 인간은 버러지 같은 인간이야. 쓰레기도 저런 쓰레기가 없지!’라는 생각을 한다. 이 생각은 곧 ‘나는 선하고 의롭지. 저런 쓰레기는 아니지!’라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도 사탄이 눈에 불을 켜고 잠복하며 기다리는 노림수다.

요컨대, 형태는 다르지만, 피해자도 자칫 동일하게 악한 결과를 겪을 수 있다. 그래서 피해자 스스로가 이러한 2차 피해를 방지할 방법으로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자.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일단 가해자가 원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피해자로서 겪은 피해 사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따져본다. 피해자도 수치심을 느낀다(가해자만 느끼는 게 아니다).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모든 피해 항목을 객관적으로 따져서 적어보라(1,000가지가 될 수도 있다). 가해자의 그 모든 잘못은 가해자가 언젠가는 반드시 갚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알자. 창조주 하나님 앞에 속죄 없는 용서는 없다. 다만 피해자가 가해자의 그 많은 잘못을 다 처벌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율적이고(autonomous) 적극적인(proactive) 자기 발현(self-actualization)이다. 자율적, 적극적, 자기 발현 등의 단어들은 살아있음을 형용하는 수식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에 닿는다. 일단 살자. 살아야 한다. 쓰레기 같은 가해자 때문에 소중한 당신의 존재까지 희미해지는 비극은 막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은 거대한 변화다. 힘을 잃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할 유일한 능력이다. 그리고 그 완전하신 사랑은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각자의 것이 될 수 있다.

남을 사랑할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사랑을 경험하는 데서 나온다. 원수를 사랑할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인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온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우리 자신도 여전히 마음으로 간음하며 산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신다고 한다. 그 사랑 때문에 원수 같은 사람들과 동행할 용기를 얻는다.

원수가 피할 수 있는 관계라면 피하라. 다만 부부관계를 맺은 피할 수 없는 관계라면 자율적이고 적극적으로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구현하라.

“이혼이 답일까?”를 연재하며 마지막으로 결혼에 성공하고 있는 커플들의 공통점 중 마지막 다섯째, “그들은 인생의 문제를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도움을 받았다.”를 다루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 주위에 두신 목회자와 상담 전문가들을 활용하길 바란다.

이메일: [email protected] (정우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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