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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1월 22, 2024

자유와 통제, 어디로 갈 것인가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잠6:7)

여기 ‘감독자’(쇼테르)는 하급 사무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노역(勞役)을 할 때에 애굽의 관리 밑에서 패장(牌將) 역할을 하던 히브리 사람을 가리킵니다(출5:6, 10). 어떤 때는 그들은 애굽의 관리보다 더 악질적이어서 동족 노예들에게 채찍질하고, 발로 차고, 욕하고 인간 이하, 마치 짐승 취급하듯이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와 통제를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존재이지 억압과 통제를 받으면서 짐승 취급받으면서 살아갈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인생들이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명령과 규례를 주신 것은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하여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그냥 방치하면 자유를 방종(放縱)으로 바꾸어 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에(롬1:26) 그들의 삶을 관리하는 데드라인(deadline), 즉 인간으로서 이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최종의 한계를 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독교의 복음은 억압과 통제가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통제에서 해방, 율법의 억압과 그 저주에서 자유, 사탄의 쇠사슬에서 해방의 역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골2:13-15). 속량(贖良)과 구속(救贖)이라는 것은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값을 지불하고 자유와 해방을 주신 것을 가리킵니다(갈3:13, 5:1).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눅4:18)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통제 사회를 원하지 않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일제 36년 동안 억압과 수탈(收奪)과 통제를 받으며 암울한 시대를 살다가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일제의 통제보다 더 강력한 억압과 통제의 이념을 가진 공산주의 사상과 자유 민주주의 사상의 대립과 갈등을 겪다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겠다는 일념(一念)으로 대한민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잠시 독제 권력의 아픔을 겪었지만 민주화 투쟁을 통하여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회복하여 성장,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좌파적 정권이 들어서면서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빼버리고 온갖 통제법을 제정하여 국민들을 억압,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의 사상과 이념을 실현해야 할 사명자입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권력과 법에 동조하고, 절대 지지를 보내고, 앞장서고, 찬양하는 행위는 복음의 정신을 저버리는 십자가의 원수요, 복음의 배반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복음 안에서 주신 자유와 해방을 상실하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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