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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6월 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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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욱 목사] 용서, ‘용~서’야 됩니다

이기욱 목사 알링턴 사랑에 빚진 교회

어느 제자가 스승께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용서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원수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스승이 큰 소리로 “용서” 그랬습니다. 못 알아들은 제자는 다시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용서하냐고 물었는데 용서라고 또 말씀하시니~ 잘 모르겠습니다.” 구랬더니 스승이 “야, 이놈아. 용을 써, 용을 써야 용서가 되지.” 하더라는 겁니다.

용서가 그 만큼 용을 써도 힘드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목회자로서도 용서가 참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목회하다보면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사실처럼 이야기 되고, 그래서 오해받고, 아파하고 하는 일들이 종종 생깁니다. 그 때마다 ‘이건 이래서 사실이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면 그 말을 했던 영혼이 설자리를 잃고 떠날까 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래서 혼자 그 일들을 가슴에 묻고 모른채 하며 흘러보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일들이 자꾸 자꾸 쌓이다보니 제 스스로도 용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쓴뿌리가 되어 자신을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어느 시인이 “미움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용서가 만든 지우개가 필요합니다” 라는 글을 남겼는데 생각해 보면 용서하지 못해 남은 쓴뿌리들이 결국은 미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반대말이 미움입니다. 결국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미움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성경에서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내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용서할까 말까?’ 선택권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 용서할 감정이 있느냐?’ 물으신 적도 없으십니다. 그냥 “용서하라.” 명령하시는 겁니다. “용서해 줘라~” 그러면 너가 결국은 승리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가 노래하기를 늘 하듯이, 물고기가 헤엄치기를 늘 하듯이, 그저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하기를 늘 힘 써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주님 앞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하는 일과 용서받는 일일 겁니다. 용서는 그래서 ‘용~서’ 입니다. 용을 써야 합니다. 용서 하기를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간음현장에서 붙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 나 온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인은 돌로 쳐야 하는데 선생은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율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면 치면 되지 왜 예수님께 끌고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 함정을 파기 위해서, 덫을 놓기 위해서, 예수님을 딜레마에 빠뜨리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땅에 몸을 굽혀 글을 쓰셨습니다. 두 번 반복해서 쓰셨습니다. 첫 번째 글을 쓰시고 일어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 말이 떨어지자 한 사람 두 사람씩 돌을 내려놓고 떠나갑니다. 두 번째 글을 쓰시다가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갔느냐” 그랬더니 그 여인이 “주여 아무도 없나이다!”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간음현장에서 붙잡히면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돌이 율법이고, 내 중심이고, 내 기준이고, 도덕이고 윤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율법대로 우리 중심의 생각대로는 ‘납득이 안되서~” 그냥 던져서 여인의 머리를 깨뜨려야 되는데…  그 돌을 지금 예수님께서 막아 주시고 계십니다. 이 여인이 맞아야 될 돌을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막으시고 손과 발로 막으셔서 십자가에 대신 못 박아 주시는 겁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내가 정죄하는 그 사람,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을 또한 살리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대신 서서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주님 만나고 돌을 내려 놓으니 서로에게 용서가 일어나는 겁니다. 주님 만나고 주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니 어느 순간 내 고집, 내 욕심, 내 중심, 내 교만등이 내려 놓이게 되더라는 겁니다. 세월이 오래 걸려도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러면 용서가 되더라는 거지요.

용서는 용을 써야 하는 일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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