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와 도피 사이에서!” 동방정교회 신학자 알렉산터 슈머만의 책,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비아,2022) 부록에 실린 글의 제목이다. 그는 오늘날 현대문화를 이끄는 양극화 현상중의 한 쪽에는 ‘유토피아주의’가 있고 또 다른 한 쪽에는 ‘도피주의’가 있다고 분석한다. 유토피아주의는 인간이 미래에 완전과 성취와 탁월함을 이룰 수 있다는 거대한 기대감으로, 현재의 어떤 위험과 결핍이 있어도 마침내는 극복될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유토피아(Utoia)는 부정적 접두사 ‘U’와 장소를 의미라는 ‘Topos’의 합성어이다.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낙관주의는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또 다른 한 극단에는 ‘반 유토피아(Anti-utopia)’, 또는’ 도피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지구상의 가장 어둡고 극단적인 파국을 예견하고 있는 오늘날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곳”에 대한 기대자체가 절망을 넘어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내다보게 만든다. 슈머만에 의하면 프랑스에서는 강요받는 삶의 방식을 비난하며 “지하절, 일, 잠”으로 이루어져 있는 삶을 당장이라고 그만 두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 직장에 가고 일하고 잠자는 것이 반복되는 일상의 삶속에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유토피아(Utopia)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망에 사로잡힌 디스토피아(Dystopia)도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본다. 사실, 구약성경의 사람들이 꿈꾼 유토피아는 하나님의 통치였다. 이사야 11장은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메시야 대망의 노래가 실려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하는 때, 그때에 그는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다(1-3절).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 통치자처럼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할 것이다. 이사야 11장 6절 이하는 그 상황을 이렇게 예언한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통치(나라), 또는 하늘나라(하늘의 다스림)가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말씀하셨다. ‘너희 안에’는 헬라어로 “엔토스 휘몬”이다. ‘엔토스’는 ‘가운데’라는 뜻과 ‘안에’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다. 이 구문을 ‘너희 안에’라고 번역하면, 바리새인들의 마음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고 말했을 리 없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바리새인들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 자신과 도래했음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11장에 약속된 메시야의 Utopia는 더이상 ‘U-Topos’가 아닌 이미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2000년 전에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8장에 유대인들이 끌고 온 예수님께 빌라도가 질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 예수님은 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36) 빌라도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답하신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노라”(37절).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 세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 질서를 따라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사야 11장 6절에 ‘어린 사자’는 아기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힘이 팔팔하고 한번 겨냥한 사냥감은 놓치지 않는 ‘젊은 사자’를 가리킨다. 힘있는 젊은 사자가 살진 짐승이 옆에 있어도 먹지 못하고, 오히려 함께 어린 아이에게 끌려 다닌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통치(Utopia)가 아니라, 우리 욕망이 실현되는, 실지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유토피아를 꿈꾼다. 내가 살진 짐승을 마음껏 농락하는 젊은 사자가 되는 그런 나라를 욕망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이사야서 11장이 묘사하는 그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희망고문으로 남는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속한 나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우리는 그 십자가를 외면한 채, 우리 욕망이 충족되는 유토피아를 구하고 있다. 그 유토피아는 녹아내리는 빙하때문에, 미사일로 폭격하며 전쟁하는 나라들때문에, 태극기를 흔들며 방언기도를 읊어대는 사람들때문에, 굿판을 벌이며 계엄날짜를 점치고, 그것에 동조한 이들의 음흉한 정치인들과 금새 공염불처럼 사라질 정의를 향한 가벼운 외침들때문에, 쉽게 디스토피아주의로 달려가게 만드는 우리 욕망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를 사는 이들이다. 존재하지 않는 장소인 유토피아,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를 유토피아로 소유한 이들은 디스토피아로 도피하지 않는다. ‘지하철, 일, 잠’의 반복된 일상이라도, 그곳에서 우리 주님의 통치를 보며, 그 나라가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참된 유토피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