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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0월 4, 2024

[전남수 목사] 예배의 실패, 모든 것의 실패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담임(2003-현)
경북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B.A/M.A)
고려신학대학원 졸(M.Div)
Missionary Baptist Theological Seminary(Th.M) Houston Graduate School of Theology(D.Min) Central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겸임교수

예배에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왕들의 흥망성쇠가 이를 증명합니다.
예배에 실패했을 때,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가문 그가 섬기는 나라까지 망하는 것을 봅니다. 인생은 원래 죄인이이어서, 죄를 지어도 회개할 길을 찾으면 될텐데, 그 길을 찾지 못해 망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다 살아나는 데, 예배의 실패가 회개의 길을 막아버림으로, 마침내 버림받게 된 것입니다.
단적인 예가 사울왕입니다. 사울왕은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베냐민지파는 아주 약하기 그지없는 지파입니다. 그런데 그 베냐민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한 가문인 기스 집안에서 왕이 됐습니다. 도저히 왕이 나올 수 없는 그런 가문인데 왕을 배출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 마땅한 반응은 감사하며, 더욱 겸손해 행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세워주셨다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다고, 하나님 나를 축복해주셨다고, 그래서 더욱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 이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사울왕도 처음에는 은혜 앞에 겸손하게 처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타락합니다. 하나님 보다, 자기 머리에 얹혀진 왕관이 더 좋아 보였습니다. 이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생각, 판단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은혜를 잊어버리고 놓치는 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은혜 때문에 갈수록 좋아지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텐데, 은혜를 잃어버리자 결국 실패의 내리막 인생길을 달려가게 됩니다.
은혜를 잃어버리면, 찾아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스스로 책임지는 인생,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이 찾아온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의 삶을 표현하면, ‘잘 되면 감사하고, 안 되면 기도’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진 사람은 ‘잘 되면 교만하고, 안 되면 원망’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은혜를 잃어버리고 교만이 찾아오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예배를 경홀히 여기는 자리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사울의 교만이 예배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사울이 사무엘 오기를 기다립니다. 이제 전쟁을 시작해야 되는데 예배를 드리고 시작해야 하는데, 사무엘이 오겠다고 말했으니 기다려봅니다. 그런데 약속한 사무엘이 정작 제때 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사울왕은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그냥 드려버립니다. 예배를 해치워버린 것입니다. 경홀히 여겼습니다. 군사전쟁의 승리로 자신의 왕관을 지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예배가 전락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와서 사울왕을 책망하자, 그는 ‘부득이해서 그렇게 했노라’라고 대답합니다. 부득이하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억지로 해치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 안 드릴 수는 없고, 예배드리고 전쟁을 치러야 되니까 형식적으로 그냥 해치웠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속에 뭐가 들어 없습니까? 회개하는 심령이 없습니다.
사무엘이 책망할 때,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죄가 용서받도록 나를 위해 제단을 쌓아주세요.” 그렇게 했더라면 살았을 터인데, 부득이하다는 핑계와 원망속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회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버림받는 것을 봅니다. 그는 길보아산 위에서 죽은 후 목이 잘리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걸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목이 잘린 채로 그 시체가 한참이나 떨어진 성벽까지 아마 질질 끌려서 갔을 것입니다. 예전에 이라크의 후세인왕이 죽었을 때에 냉동 창고에 집어넣고 사람들이 발로 막 차면서 사진을 찍고 놀잇감 취급을 했었습니다. 사울왕이 죽었을 때도 이분이 왕이었으니까 곱게 모시고 가서 성벽에 걸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절절하게 표현을 합니다. 길보아산에서 벧산 성벽을 가려면 개울도 지나가고 돌밭도 지나가야 하는데, 그곳까지 질질 끌려가서 그냥 벧산 성벽에 떡하니 걸린 게 사울의 마지막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번 버리시면, 무서운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버리시면, 인간이 가지는 명예와 행색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울왕이 죽었을 때, 아들 셋도 한날 동시에 그렇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자 므비보셋은 절뚝발이가 됩니다. 예배가 실패가 가져온 비참한 결과입니다. 인생의 죄악된 교만이 있다해도 예배가 온전하였으면 그는 회개했을 것이고 회복이 되었을 텐데, 그 죄가 예배와 관련되다 보니 살길이 없어진 것입니다. 예배가 무너지고 나니까, 회복될 틈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에 비해 다윗은 세상적으로 보기에 더 험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은 받아주시고, 받아주실 뿐 아니라 다윗 때문에 자손의 왕위를 보전한다고 약속도 했습니다. 사울이 애매하게 사람을 죽였습니까? 성적인 죄를 지었습니까? 단 한 가지 하나님 앞에 예배를 실패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버림을 받았고 다윗은 은혜를 회복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회개와 예배’를 기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앞에 중심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회개에 인색하지 않는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살리는 길이 되었습니다. 예배의 온전함이 있을 때, 죄의 사유하시는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가 실패할 경우, 회개의 영이 떠나가고 마침내 멸망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내가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누구나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해 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가리움 받을 길이 있습니다. 예배에 나아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예배드리는 가운데 설교자를 통해서 듣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을 때 회복이 됩니다. 회개가 됩니다. 그러나 예배가 되지 않고 회개할 마음이 생기지 못하면, 결국은 망할 때까지 그냥 달려갑니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의 실패에 대단히 예민할 뿐 아니라, 예배 가운데 그 어떤 소원보다도 ‘회개의 영’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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