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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5월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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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영 목사] 젊은 시절 추억 속에 남아있는 교회 (하)

안지영 목사 나눔교회담임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부교수

내가 학습문답과 세례문답을 마친 후 세례를 받았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 받았던 학습과 세례 교육 내용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요. 그래도 이 과정을 다 이수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교육 모든 과정을 빠지지 않고 다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세례를 받고 나서 곧바로 이어진 공동의회에 참가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교회 예산 부분을 살피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담임목회자의 도서비 액수였습니다.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지요. 나는 중고등부 일로 담임목사 사택을 여러 번 들락날락했기에 목사님 서재에 새 책이 얼마나 있는지 거의 파악하고 있었거든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다만 합리적이지 않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지요. 이제 겨우 교회 생활 1년 차밖에 안 됐기에 멋도 모르고 그런 질문을 한 거지요.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러한 질의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담임목사에게 책정된 예산에 무엇인가 합리적이지 않은 점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지요. 이 우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나를 교회와 목회자에 대하여 점점 불편한 느낌이 들게 만들더군요.

내가 또 한 가지 답답하게 여겼던 점은 성경과 신앙에 관한 의문점들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처음 교회를 갔으니 모든 게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특히 창조, 타락, 구원 등등의 신학적 내용들이 어찌 이해가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구원의 확신’이라는 주제는 나를 매우 힘들게 만들었지요. 확신이라는 게 어찌 한결 같을 수가 있겠나요. 어떨 때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가도 다른 때는 확신의 그림자 조차도 없는 것 같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확신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련회에 열심히 참가하였지요.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여전히 불확실한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여러 학생선교 단체와 다양한 교단의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물론 기도원도 찾아다니면서 말이지요. 한 번은 추운 겨울에 한 기도원에 올라가서 눈발을 맞아가며 기도하다가, 주님께 이렇게 투덜거렸지요. “하나님, 다른 사람들은 이 시간에 모두 잠들어 있는데, 나는 왜 이곳에서 추위에 떨고 있어야 하는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성경 본문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설교나 성경공부에서 다룬 본문에 대해 질문을 하면 결국에 돌아오는 대답은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된다”는 거였습니다. 질문을 의심하는 걸로 오해한 건지, 믿음이 떨어지게 될 거라는 경고와 함께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가진 의문점을 풀지 않고는 헌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확신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순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찾기 위해 약 칠 년 간 헤매다가 IVF에서 개최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이동원 목사님의 히브리서 강해를 듣게 되었지요. 그때가 나의 인생의 전화점이 되었습니다. 그 설교에서,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구원의 확인’을 얻게 된 거지요. 나의 구원을 확인해 주는 근거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흔들린 적이 없었지요.

이렇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로 발을 내디뎠던 거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답답한 면이 있었지만, 이 모교회에서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했으니까요. 첫째로, 내가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도 질문이 많은 아이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질문이 나로 하여금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거지요. 둘째로, 공평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그냥 침묵하고 있지 못하는 아이란 걸 알았습니다. 교회 안에 형성되어 있던 차별 구조의 부당함을 공론화하려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셋째로, 교회의 여러 부서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넷째로, 다양한 세대와 함께 예배 활동에 참여하면서 어른들과의 대화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른과의 대화가 편했고, 그분들 또한 교회 친구들 부모였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학교 배경의 친구들을 알게 되고, 당시에는 얘기나누기도 힘든 대학생 선배들도 알게 되었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얼마전에 이 교회 고등부에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을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50년 만에 만난 선배도 있었지요. 각자 흩어져 살아온 세월이 이렇게 지났는데도 여전히 주님과 동행하는 그 모습들이 참 귀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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