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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7월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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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문 목사] 눈에 보이는 길 너머 (부제: 순간순간이 선택의 순간)

안광문 목사(생명샘교회)

            룻기 1장은 베들레헴 출신의 엘리멜렉이라고 하는 사람의 가족사로서 시작합니다. 베들레헴에 심한 기근이 들었는데, 먹고 살 것이 막막하게 된 엘리멜렉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인근 모압이라는 이방 땅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만 엘리멜렉은 거기서 죽었고 과부가 된 나오미가 두 아들을 현지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이제

살만한가 했는데 그만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여자분들도 경제력이 있지만 당시 여자분들, 거기다 경제력이 전혀 없는 과부였으니 이 상황이 얼마나 막막했겠습니까? 결국 시어머니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 과부에게 답이 없으니 차라리 각자 도생을 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거기다 마침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어 먹고 살만하다는 소식도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먹고 살겠다고 고향을 떠났지만 미우니 고우니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며느리들에게 어떤 것도 보장해 줄 수 없는 자기를 따라오지 말고, 각자 친정집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삶을 찾아보라고 하는 나오미의 마지막 배려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며느리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기도 합니다. 모압 출신 며느리들에게 모압 신과 하나님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로 신앙이 다른 며느리들과 같이 가는 것이 며느리들이나 그곳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나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룻기 1:15에서 보면,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보면 나오미의 말을 신앙적인 부분을 빼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두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에게는 은혜의 길과 멸망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됐던 것이었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뜻과 의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또 친정집으로 돌아가 모압 신을 섬기다 멸망하는 멸망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오르바는 멸망의 길을 선택했고 룻은 은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후로 오르바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룻은 다윗 왕의 계보,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계보에 영원히 남게 됐습니다. 오르바나 룻의 입장에서 보면,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거기는 유대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자기들만 이방인으로 말과 문화와 종교와 모든 것이 다르기만 한 낯선 곳입니다. 그렇지만 시어머니를 혼자 보내는 것이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친정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거기는 모든 것이 익숙한 곳입니다.

            멸망의 길은 눈에 너무 환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계산해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유리하고, 이익이고, 남는 장사라는 것이 훤하게 보입니다. 계산이 나옵니다. “편하고 좋은 길을 놔두고 왜 굳이 어려운 길을 돌아가야 해?” 우리도 순간순간이 그 선택의 순간입니다. 생각 없이 늘 하던 대로, 눈에 보이는 유익을 따라서,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고, “아, 이렇게 하면 유리하겠구나.” 무심코 내린 결정이 어쩌면 은혜의 길이냐 멸망의 길이냐 이것을 결정하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세밀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영적인 귀가 무뎌진다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다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보여주셔도 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할까요? 느헤미야 2:4에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왕께서 또 나에게 물으셨다. 나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나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신하로서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이 불타고 무너져 어려움 가운데 있었던 동족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 자신이 그곳으로 가서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 민족 사람들의 상황이 어떤지,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왕에게 부탁할 것은 무엇이고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준비했습니다. 문제는 그 당시 법으로는 신하가 먼저 왕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왕이 뜻하지 않게 자기에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느 2:4)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잠깐만요.”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나서,” (느 2:4) 그 순간 뭘 기도했을까요? 눈에 보이는 유익, 멸망의 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그 너머에 있는 은혜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 달라스 생명샘 교회 안광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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